반복되는 오르막, 내리막에 부딪힐 뻔한 아찔한 상황들 이어져

[더팩트|서울 남산, 경복궁=오승혁 기자] "보행에 지장을 주는 5인 이상의 무리 지어 달리기를 하지 않습니다."
16일 저녁 ‘오승혁의 현장’은 러너들 사이에서 도심·트레일 러닝 명소로 알려진 서울 남산공원을 찾았다. 퇴근 시간대를 조금 지난 오후 7시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러닝 크루들은 익숙한 듯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삼삼오오 모여 운동 전 추억을 남기는 이들을 뒤로하고 ‘삼순이 계단’을 따라 남산공원 입구로 향했다. 21년 전인 2005년 큰 인기를 끈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배우 현빈과 김선아가 엔딩 키스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계단에서는 드라마 속 장면을 따라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영상을 촬영하는 연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삼순이 계단'을 지나 남산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몸을 푸는 러너들 뒤로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방송은 러너들에게 5인 이상이 무리 지어 달리는 행위와 상의 탈의, 벤치 등 휴게시설을 장시간 차지하는 행동을 삼가고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원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공원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에도 같은 취지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안내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혼자 또는 두세 명이 함께 달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5인 이상 무리 달리기’를 삼가 달라는 안내가 무색하게 여러 명이 대열을 이뤄 뛰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한 무리가 지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러닝 크루가 나타났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고 구간에 따라 폭이 좁아지는 남산공원 산책로에서는 아슬아슬한 순간도 이어졌다. 내리막을 달리던 러너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거나 앞서 걷던 시민을 가까스로 피해 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길 안쪽을 걸으며 취재를 이어가던 취재진도 뒤에서 접근한 러너들과 부딪힐 뻔한 순간을 몇 차례 경험했다.
취재진 앞에서 남산을 걷던 인근 직장인들은 퇴근 후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공간이지만 러닝 크루가 잇달아 등장할 때는 불안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자신의 속도대로 걷던 보행자 입장에서는 뒤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지나갈지 즉시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어린이나 노인, 반려동물과 함께 걷는 시민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 가능성이 있다. 러너가 충분한 간격을 확보하지 않거나 앞사람을 추월하기 위해 좌우로 퍼지면 충돌 위험은 더욱 커진다.

남산공원이 ‘5인 이상 무리 달리기’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러닝 자체를 막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행자의 통행을 방해할 정도로 대열을 만들지 말아 달라는 취지다.
트레일 러닝은 산길과 숲길, 흙길 등 자연 지형을 달리는 운동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해서 달리고 코스에 따라 걷기와 달리기가 섞인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도심 로드 러닝과 구분된다. 세계육상연맹도 트레일 러닝을 육상의 한 종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만 이날 남산에서 만난 러너들을 모두 트레일 러너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도심 러닝 인구가 남산과 북악산 등 산지형 공원으로 이동하면서 두 문화의 경계도 점차 흐려지는 모습이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들어 ‘산악마라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2010년대 중반 전문 대회와 관련 장비 시장이 형성되면서 트레일 러닝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확산했다. 2015년 경기 동두천에서 시작된 ‘코리아 50K’는 국내 최초로 국제트레일러닝협회(ITRA) 인증을 받은 대회다. 이후 코로나19 시기 실내 운동이 제한되고 야외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입문자가 더욱 늘었다.
현재 국내 트레일 러닝 대회를 모두 합산한 국가 차원의 공식 통계는 없다. 다만 서울과 경기, 강원, 경남,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10㎞ 안팎의 입문 코스부터 50㎞·100㎞ 이상의 울트라 코스까지 다양한 대회가 열리고 있다.
대형 대회의 참가 규모는 이미 수천 명에 이른다. 2025년 서울국제울트라트레일러닝대회 ‘서울100K’에는 100㎞와 50㎞, 10㎞ 종목을 합쳐 3010명이 참가했다. 2024년 제주에서 열린 ‘트랜스제주 by UTMB’에는 48개국 약 4000명이 출전했다.
산과 도심을 달리는 문화가 일부 동호인의 취미를 넘어 대규모 생활체육으로 성장한 셈이다. 참가자가 늘어난 만큼 좁은 산길과 산책로에서는 대열을 나누고 보행자 주변에서 속도를 낮추는 등의 안전 수칙도 중요해지고 있다.
이 같은 광경은 지난 7일 찾았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이미 예고됐다.
당시 ‘오승혁의 현장’은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과 인접한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았다. 안내데스크 뒤편에는 소형과 대형으로 구분된 물품보관함 78개가 설치돼 있었다. 여러 층에 마련된 전시실과 체험·교육 공간을 관람하는 방문객이 가방과 캐리어 등을 맡길 수 있도록 마련된 편의시설이다.
그러나 현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일부 러너가 운동복과 신발, 개인 짐을 장시간 보관하면서 정작 박물관 관람객이 물품보관함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러너들 사이에서는 박물관의 무료 물품보관함이 일종의 ‘꿀팁’처럼 공유됐다고 한다.

일부 이용자는 박물관 화장실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가방과 옷을 보관함에 넣고 경복궁과 종로, 청계천, 서촌, 북악산 일대를 달렸다. 운동을 마치고 박물관으로 돌아와 화장실에서 땀을 닦거나 씻은 뒤 다시 옷을 갈아입는 사례도 있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문제는 박물관 운영시간 밖에도 이어졌다. 개관 전이나 폐관 후 "보관함에 짐을 두고 왔다"며 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하거나 출입문을 두드리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안내와 방호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의 부담도 커졌다.
결국 국립고궁박물관은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현장 안내문을 통해 "박물관 물품보관소는 박물관 관람객을 위한 공간"이라며 러닝용품 보관을 삼가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당시 박물관 관계자들은 달리기 문화 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건강한 여가 활동은 반가운 일이지만 공공시설의 설치 목적과 다른 이용자의 권리도 함께 존중해 달라는 취지였다.
그로부터 9일 뒤 남산에서 목격한 풍경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산에 이어 다시 찾은 경복궁 주변에서는 러닝 크루가 광화문과 궁궐 담장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경로를 따라 달리면 강아지 모양이 완성되는 이른바 ‘댕댕런’ 코스가 알려지면서 경복궁과 청와대, 북촌·서촌 일대는 새로운 러닝 명소로 떠올랐다.
경복궁과 청와대 주변에는 좁은 보행로와 골목이 적지 않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출발하거나 대열을 이뤄 달리면 시민과 관광객이 이용할 공간은 급격히 좁아진다.
종로구도 거리 안내물을 통해 ‘한 줄로 조용히 달리기’ 등 러닝 에티켓을 지켜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안내가 잇따르는 것은 러닝 인구의 증가 속도를 기존 보행 환경과 공공시설 운영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트레일 러닝을 비롯한 달리기 문화가 확산하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특별한 시설이나 장비 없이 시작할 수 있다. 혼자 달리며 성취감을 얻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의 자유가 같은 길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의 불안과 불편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공원 이용 수칙을 무시하거나 좁은 길을 여러 명이 차지한 채 달리는 행동은 러닝 문화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달리기의 속도와 보행자의 속도는 다르다. 러너에게는 충분히 피해 갈 수 있는 거리로 보여도 걷는 시민에게는 갑자기 누군가 달려오는 위협적인 순간으로 느껴질 수 있다. "지나가겠습니다"라는 짧은 안내도 필요하지만,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안전을 위한 주의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리를 나누고 한 줄로 달리며 혼잡한 구간에서는 속도를 낮추거나 잠시 걷는 행동이 필요하다. 보행자가 먼저 지나가도록 기다리고 공공시설을 원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도 특별한 규제가 아니라 함께 공간을 이용하기 위한 기본적인 약속이다.
남산과 경복궁은 러너들만의 코스가 아니다. 퇴근 후 천천히 걷는 직장인과 등산객,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국내외 관광객도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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