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핸드볼 전설' 윤경신 "獨 시절, 차범근 조언 힘이 돼" ①편
그렇게 윤경신은 한국 핸드볼 사상 처음으로 지난 1997년 독일 분데스리가 굼머스바하로 진출했다. 독일에서 핸드볼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매 경기 6천명 이상의 관중이 꽉 들어차며 1부 리그 18개 팀, 2부 리그 36개 팀 등 하부리그까지 합치면 무려 3천여 개 팀이 있다.- 독일에 처음 갔을 때 열기는 어땠나요?
팀 연습을 할 때도 우리 돈 3천원을 지불하고 1,500명 이상의 관중들이 몰려들어요. 우리나라는 공짜 경기도 별로 안 오는데.(웃음) 당시 동양인이 최초로 구단에 입단한 것이 화제였죠. 깜짝 놀랐어요. 날 보러 수많은 팬들이 왔다는 것이.
- 초창기 독일어를 못해 'Nick (고개를 끄덕이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요?
알아듣지 못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더라고요.(웃음) 우스꽝스럽지만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해외 생활에서 언어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제가 욕심을 부렸어요. 구단에서 통역을 붙여 준다는데 싫다고 했죠. 그때는 '선수랑 통해야지, 통역이랑 통하지 말자'고 다짐했었어요. 그래서 독일어를 빨리 익혔죠.
- 독일 진출 2년째인 1998년에 득점왕을 차지했는데요?
처음에는 키 큰 동양인 선수가 세계대회 득점왕 출신이라고 골게터를 맡는 것에 동료들의 시기, 질투가 있었어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저 다가갔죠. 바보 소리도 들었고요. 그 친구들이 처음에는 가식이라고 느꼈지만 나중에는 한국 사람 특유의 예절과 문화임을 알게돼 친근함을 느끼더라고요. 이후 편하게 핸드볼을 한 것 같아요.
- 2002년까지 무려 6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어요. 기존 기록은 3시즌 연속이 최고였다고요?
뿌듯했죠. 처음에는 독일에서 이겨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언론에서 '윤경신이 굼머스바하를 살렸다'고 보도했고, 팬들도 좋아하셨어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어요.
- 하지만 2002~2003시즌 7연속 득점왕을 저지하기 위해 다른 팀들이 페널티스로를 한 선수에게 몰아줬다고 들었어요. 그해 득점왕이 사상 최대의 121개의 페널티스로를 던졌다고 하던데요?
득점왕도 팀 마다 경쟁심이 있었어요. 다른 팀들이 어떻게 동양인에게 계속 득점왕을 뺐길 수 있냐며 자존심 상해했죠. 유럽 선수를 밀어주자는 분위기였는데, 저희 팀은 페널티스로를 돌아가면서 던졌거든요. 뭐, 어쩔 수 없죠.(웃음)

세계 최고의 리그인 독일 분데스리가를 누빈 당시 선수들과 핸드볼 팬 역시 윤경신의 놀라운 득점 행진에 입을 쩍 벌렸다. 상대팀의 견제로 7연속 득점왕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6연속 득점왕 기록과 2000~2001시즌 달성한 단일시즌 최다득점(324골) 신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324골은 분데스리가 역대 시즌 유일한 300득점을 넘는 기록이다. 그리고 2007년 3월에는 개인통산 2661번째 골을 기록하며 종전 분데스리가 개인 최다득점 기록(요헨 프랏츠, 2660골)을 경신했다. 참고로 요헨 프랏츠는 페널티스로를 8백여 개 던진 것에 비해 윤경신은 5백여 개에 불과해 그 의미가 더 컸다.
- 당시 요헨 프랏츠의 기록을 깼을 때를 어떻게 기억하나요?
원정 경기였어요. 보통 원정은 굼머스바하 팬들이 200~300명 정도가 오시는데 그때 제 기록 달성 여부를 아시고 500명가량 오셨죠. 저는 몰랐어요. 경기를 하다보니까 기록 경신이 됐다고.(웃음) 내가 그런 기록을 깼구나. 놀랐죠. 경기 후 팬들로부터 선물과 꽃다발을 받았어요.
- 굼머스바하에서 11년 간 뛰었는데, 팀이 재정난을 겪으면서 몸값에 부담을 느껴 함부르크로 이적시켰다고요.
팀에 오래도록 남고 싶었고 은퇴 후에도 행정이나 마케팅을 배워 한국에 가고 싶었는데 구단주가 바뀌면서 저와 생각하는 부분이 좀 맞지 않았어요. 떠날 수밖에 없었죠. (고별 경기 때 경기장이 울음바다가 됐다던데) 그건 모르겠네요.(웃음) 저는 땅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성대하게 해주셨어요. 역사상 2만 명의 관중 앞에서 고별식을 해준 것은 처음이었어요.
- 실제 짐을 싸서 함부르크로 갈 때 심정은 어땠나요?
복잡했죠. 아쉬웠고요. 희로애락을 함께 한 팀이니까요. 굼머스바하의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아쉽게 구단 내부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면서 슬펐어요. 그러나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을 빨리 고쳤죠.
- 함부르크에서의 2년, 어땠나요?
함부르크가 교포들이 많거든요? 아내가 굼머스바하에 있을 땐 힘들어했는데 함부르크로 가서 친구들을 사귀며 밝아졌어요. 아이도 키우느라 우울증도 있었거든요. 저 보다 아내가 밝아져서 좋더라고요. 저도 또 우승을 하면서 즐겁게 핸드볼을 한 것 같아요.
- 2008년 한국 무대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13년 간 독일에서 엄청난 기록을 남겼고 전설로 남았어요. 돌아오게 된 계기는요?
아들이었던 것 같아요. 2007년에 4살이었는데 독일에 남느냐, 한국을 가느냐를 놓고 고민했죠. 함부르크에서는 2년 재계약을 원했는데 2년을 더 하면 아들이 한국어를 못 배울 것 같기도 했고, 저 역시 13년 간 있으면서 지쳤다고 느꼈죠.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 한국이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마음이 지쳐있었던 것 같아요. 아내도 다시 일을 하고 싶어했죠.

13년의 독일 생활. 그야말로 20대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고 희로애락이 점철된 소중한 시간으로 남았다. 최고의 순간으로는 역대 한 시즌 최다득점 신기록과 함께 세계핸드볼연맹이 주관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던 2001~2002시즌을 꼽았다. 무엇보다 13년 동안 큰 부상 없이 사랑하는 핸드볼에 자신을 바칠 수 있었다는 것이 행복했단다. 오기와 근성, 실력으로 똘똘 뭉친 그의 독일 신화는 찬란하게 귀결됐다.
- 아내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를 1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만났어요. 아내는 당시 선수촌 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죠. (머뭇거리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웃음) 당시 제가 대학교 3학년이었는데 선배들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자주 마시다가 어느 날 맥주를 조금 마시고 싶은거에요. 카페 사장님께 부탁했죠. 대학생이라서 돈이 없는데 사주시면 안 되냐.(웃음) 꼭 갚겠다. 그리고 사장님이 사주셨어요. 그 과정에서 카페에 오래있으면서 아내가 저와 동갑인 걸 알게 됐고, 사장님도 잘해보라고 하셨죠.(웃음) 선배들하고 '누가 저 예쁜 아르바이트생과 먼저 사귈까'하고 내기하자고 했었어요.
- 어떻게 교제를 하시게 됐나요?
선수촌에 문경은, 우지원 등 인기 농구 선수들과 같이 훈련을 했거든요? 아내가 농구 선수들은 아는데 핸드볼은 모른다는거에요. 그때부터 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내가 승자가 됐지만.(웃음) 몇 번 만나면서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사귀고 싶다'고 했죠. 처음에는 제가 키도 크니까 부담스러워했어요. 또 핸드볼이 비전이 없었기에 부모님들도 반대하셨을 것 같고요. 어쨌든 저를 믿고 마음을 받아줬죠.
- 1997년 독일 진출을 기점으로 결혼을 하셨다고요?
독일 가기 전에 집으로 초대를 했어요. 프로포즈를 했죠. 주변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처음에는 아내가 튕기더라고요.(웃음) 지금도 말하지만 '그때 자기가 순진했었다고'. 별로 안 순진한 것 같은데.(웃음) 아무쪼록 결혼까지 해서 독일로 건너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저를 따라줬어요. (아내도 남편이 성공했으니 흐뭇하시겠죠?)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에요. 애교도 별로 없고.(웃음) 마음속으로는 좋아하겠죠.
- 아내가 패션 업계에서 일하신다고.
독일 가기 전에도 일을 했었어요. 고 앙드레김 선생님과 친분도 있어서 제 옷을 협찬하는데 도움도 줬죠. 독일로 가서 일을 안 하고 아이 키우면서 외로움을 느끼니까 힘들어했죠. 지금은 한국에 와서 언니와 패션 관련 일을 하면서 승승장구해요. 이젠 가끔식 날 무시하던데, 잘 써주세요.(웃음)

- 마지막으로 핸드볼의 발전 방향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어요.
세계적으로 아시아의 핸드볼이 낙후된 것은 사실이에요. 은퇴 후 도움을 주고 싶고요. 핸드볼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가 만들어졌으면 해요. 아무래도 국가별 대전이 흥미로움이 더 있죠.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과 교류를 많이 한다면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현역 선수로는 이룰 것을 다 이룬 윤경신에게 제2의 꿈은 뭡니까?
선수로서는 거의 환갑이죠.(웃음) 내년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도전하겠지만. 이후 완성도 있는 제자들을 길러내고 싶고요. 핸드볼이 더 괜찮은 종목이 되기 위해서 선수를 지도하는 감독이든, 이론을 지도하는 교수든 제가 가야할 길을 가고 싶어요. 지금은 모르지만요. 꼭 일반인들이 사랑할 수 있는 핸드볼을 만들고 싶네요.
"그는 아주 똑똑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다. 경기장 안에서는 완벽한 팀 플레이어로 그를 중심으로 우리 팀이 완전한 하나가 된다. 역사상 아주 위대한 선수다." 윤경신의 독일 무대 마지막을 지휘했던 함부르크 마틴 슈발브 감독의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 한국에서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 계에서 스포츠팬들이 윤경신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아는 것은 실력 뿐 아니라 그의 남다른 인격과 자세에서 비롯됨을 느낄 수 있었다. 글쓴이와 인터뷰 전 학교 측과 장소에 대해서 미리 교감을 나누고, 인터뷰 후에도 취재진의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는 모습 속에서 남다른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윤경신. 그의 찬란한 꿈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노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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