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굳이 핸드볼을 논하지 않더라도 스포츠의 굴레에서 노닌 팬이라면 윤경신(38)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어봤을 법하다. '비인기 종목'으로 치부 받는 핸드볼에 있어 그는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을 만큼 이채로운 업적을 남긴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1990년 17살 때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돼 20년 넘게 태극마크를 달고 있다. 1996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13년 간 뛰며 역대 최다득점(2905골)과 단일 시즌 최다득점(327골) 신기록, 6회 연속 및 통산 8회 득점왕 등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2008년 국내로 돌아와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속팀 두산을 3년 간 정상으로 이끄는 등 명실상부한 한국 핸드볼의 간판스타다.
글쓴이는 22일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핸드볼 체육관을 찾았다. 패기 넘치는 대학 선수들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체육관을 가득 메울 무렵,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203cm 거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바로 윤경신. 그는 모교인 경희대에서 체육학 석사과정 졸업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박사 과정까지 준비할 정도로 최고의 선수에서 공부하는 지도자로 변신하기 위한 예열을 거치고 있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실제로 뵈니 더 크신 것 같네요.
(웃음) 그런가요? 저도 반갑습니다. 한국에 핸드볼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인데 영광스럽게 코리언 레전드에 뽑혀서 기분 좋습니다.
- 팬들은 '윤경신'이라는 이름 석 자는 알고 있지만 얼마나 잘 나간 선수였는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팬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그것보다 더 아쉬운 것은 저는 이름이라도 알고 계시지만 후배 선수들은 일반 대중들이 거의 모른다는 사실이죠. 우리 핸드볼의 실정이고요. 저만 주목받는 것도 미안할 뿐이죠.
- 핸드볼 경기를 직접 보면 다이나믹하고 재미있어요. 빠르고 점수도 많이 나고,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성향이 많은 것 같은데요.
우리나라 스포츠가 정치적 성향이 포함된 경우가 많은데 핸드볼도 그 영향이 있었다고 봐요. 예를 들어 한국은 미국 스포츠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영향이 있었잖아요? 야구나 농구에 비해 핸드볼은 유럽에서 보급돼 다른 방향으로 간 것 같아요.
- 한국 핸드볼을 대표하는 스타로서 섭섭함이 늘 있지 않나요?
인기가 없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감수하고 핸드볼을 시작해서.(웃음) 핸드볼이 그저 좋았어요. 물론 섭섭하지만 그 부분에 연연하면 오히려 위축될 수 있고요. 저는 현역 시절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고, 좋은 기회가 생겨 독일이라는 큰 무대에서 뛰어봤기에 괜찮습니다.

20년 간 태극마크를 달고 있는 윤경신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 1990년 베이징 대회를 시작으로 지난해 광저우 대회까지 무려 6회 연속 출전해 중동 편파 판정 논란이 불거진 2006년 도하 대회를 제외하고 모두 금메달을 땄다. 올림픽도 최근 2012년 런던 올림픽 아시아 예선 우승을 이끌며 본선 진출권을 따내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를 시작으로 5회 연속 출전을 앞두고 있다. 한국인으로서도 5번째 기록이기도 하다.
- 지난 2일 일본을 꺾고 개인적으로 5번째 올림픽에 나가게 됐는데.
4전5기가 될 것 같아요. 아시아경기대회는 금메달을 땄지만 올림픽에서는 메달이 없었죠. 아무래도 아마추어 스포츠는 메달이 중요하잖아요? 물론 메달에 연연하는 것 보다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가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 같아요.
- 1988년 서울올림픽 은메달 이후 남자 핸드볼의 올림픽 메달 소식이 없는데, 냉철하게 내년 올림픽을 어떻게 전망하세요?
쉽지 않겠죠. 유럽이 워낙 성장세이고 벽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계속 달릴 것이고 도전해야죠.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저와 후배들이 한 단계 더 클 수 있는 계기가 될 거에요. 흔히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주는 선물이라고 하잖아요?(웃음)
- 한국 나이로 만 39살. 평소 체력 관리를 어떻게 하시나요?
웨이트트레이닝은 꾸준히 해요. 키가 커서 뛰는 것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웃음) 게을러서. 하지만 공을 갖고 하는 기술적인 것과 파워 면에서 늘 신경을 많이 써요. (10년 전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확실히 차이가 나죠.(웃음) 뛰는 양이나 순간적인 판단력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고요.

구기 종목이라는 공통된 테두리가 때문일까. 혹은 국가대표와 독일을 오간 공통점 때문일까. 윤경신은 흔히 한국 팬들 사이에서 '핸드볼의 차범근'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축구의 대중성크기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윤경신에겐 차범근은 우상이며 존경의 대상이다.
- '핸드볼의 차범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가요?
영광이죠. 차범근 선배님은 대단하신 분이잖아요. 제가 1995년 독일로 처음 갔을 때 교민과 독일 분들이 한국 사람하면 생각하는 기준은 '차범근'이었어요.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간호사, 광부들께서 너도나도 차범근 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죠. 자기 관리가 철저하셨고, 사모님께서도 내조를 잘해주셨다고.(웃음) 많은 조언을 해주셨죠. 자연스럽게 '나도 한국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공부가 된 것 같아요.
- 실제 차범근 위원을 만나신 적도 있었다고요?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제가 독일로 가기 전 우연히 차범근 선배님께서 태릉선수촌에 오신 적이 있으세요. 저를 보시더니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것이 힘들 수 있겠지만 네가 자부심을 갖고 이겨내면 나중에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주셨죠. 동기부여가 되더라고요. (지금도 연락하세요?) 지금은 너무 높은 곳에 계셔서.(웃음) 기회가 되면 연락드리고 싶네요.
- 분데스리가에서 어떻게 제의가 왔었나요.
1991년 고2때 그리스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 나갔거든요? 그때 동유럽 관계자들이 저를 눈여겨보셨죠. 하지만 어린 나이에 동유럽에 가는 게 부담스러웠고, 그때는 대학에 가서 공부도 하고 싶었죠. 물론 대학에 가서 운동만 했지만.(웃음) 마침 대학교 3학년 때인 1995년도에 아이슬란드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득점왕을 했는데 주니어 때부터 저를 지켜본 현지 관계자들이 또 제의를 했어요. 그중 평소 동경하던 독일을 택했죠.
- 독일을 동경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중학교 3학년 때 대표팀 상비군 전지훈련을 독일에서 했어요. 그때 어린 나이에도 핸드볼 경기장에 관중들이 꽉 차는 것을 보고 실력도 없으면서 가겠다고 외쳐댔죠.(웃음) 그런데 꿈이 이뤄졌죠.<①편 끝>…②편은 윤경신의 분데스리가 시절 이야기, 아내와 만난 일화, 제2의 꿈 등이 이어집니다.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kyi0486@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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