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여자양궁의 전설' 김수녕, 중3 때 국가대표 꺾고…ⓛ편
조용히 찻잔을 매만지던 김수녕은 뜨겁고 찬란했던 올림픽의 영광을 되새겼다. 김수녕은 청주여고 1학년 때인 1987년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다. 첫 국제대회였던 프랑스 COQ 오픈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땄다. 김수녕의 성장세는 놀라웠다. 서울 올림픽을 8개월 앞둔 1988년 1월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5관왕에 올라 진정한 '에이스'로 거듭났다.

◆ 韓, 최초 ‘올림픽 2관왕’…세계선수권 ‘2관왕 2연패’ 신화
"(1988년 서울올림픽 앞두고) 심하게 긴장되거나 부담을 갖지는 않았어요. 개인전에 출전하는 3명의 선수 중 금메달을 딴다면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라는 정도의 생각?(웃음) 금메달을 땄을 때 기뻤지만 은메달, 동메달도 우리 선수였어요. 미안했죠. 다음날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마음껏 기뻐했어요."
1988년 9월 30일. 서울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 당시에는 거리별 싱글라운드 성적을 합산하는 그랜드피타라운드 방식이었다. 현재의 토너먼트 방식과 달랐다. 김수녕은 첫 거리인 30m의 9발을 모두 10점에 꽂았다. 50m에서 첫 발을 6점에 쏘며 위기를 맞았지만 60m, 70m에서 안정된 경기력으로 344점을 획득했다. 왕희경(332점)과 윤영숙(327점)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단체전 금메달까지 차지해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2관왕에 올랐다.


김수녕의 놀라운 성적은 한국 스포츠 최대 화제였다. 언론을 통해 말한 "시위를 떠난 화살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명언은 지금도 특강에서 다루는 주된 주제이기도 하다.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8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전, 단체전 2관왕,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인전 동메달과 단체전 금메달, 1991년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 단체전 2관왕에 오르며 사상 최초의 2관왕 2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양궁이 기록경기이다 보니 (세계선수권대회 기록이) 언젠간 깨질 수 있겠지만 늦게 깨졌으면 좋겠어요.(웃음) 2관왕 2연패라는 기록은 참 영광스럽죠. 당시에는 운이 좋았다고만 생각했죠. 은퇴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자랑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 깜짝 은퇴 선언 “그때는 어렸죠. 지는 것이 겁이 나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 방식이 바뀌었다. 김수녕은 개인전 결승에서 선배 조윤정에게 패하며 은메달에 머물렀다. 단체전 금메달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그의 은퇴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너무 어렸던 것 같아요. 방식이 바뀌었어도 내 자신을 믿고 잘할 수 있다고 믿었어야 했는데…. 잘난 척을 했죠.(웃음) 토너먼트는 50% 확률이잖아요? 겁을 많이 낸 것 같아요. 지는 게 싫었던 거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복귀를 선언한 것도 당시의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에요."
1993년 종별선수권대회 이후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고려대학교 3학년 재학 시절이다. 1994년 대학 선배였던 이기영씨(체육교사)와 결혼했다. 1995년 9월 딸 지원이와 1999년 2월 아들 정훈이를 낳았다. 평범한 주부로 살아갔다. 그런데 그해 김수녕은 은퇴 6년 만에 선수 복귀를 선언했다. "둘째를 낳고 나서 한 '활' 업체의 홍보 일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아서 8월부터 활을 쏘기 시작했어요."

일각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대한양궁협회 정몽구 명예회장의 비밀 프로젝트로 이뤄졌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만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어린 선수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맏언니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루머를) 듣기는 했어요. 그런 과정이 없었어도 복귀했을 거에요. '내가 옛날에 훌륭한 선수로 평가받았는데 명성에 금이 갈까'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겠죠."
지는 것에 겁을 냈던 김수녕은 어느덧 승부를 초월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고자 결심했다. '신궁'의 화려한 복귀는 미국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귀환과 비교됐다. 많은 이들은 그의 복귀 소식에 눈과 귀를 의심했다. 6년 동안 활을 놓았던 김수녕이 쟁쟁한 후배들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문제없었다. 올림픽보다 더 치열하다고 평가받는 국내 대표선발전을 당당히 통과했다. '역시 김수녕'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 ‘6년 만에’ 현역 복귀!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김수녕이 8년 만에 다시 올림픽 무대에 섰다. "세 번째 올림픽에 나가니까 기분이 다르더라고요. 경기장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올림픽 무대에서 경기를 하는 것이 참 영광스럽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선 두 번의 대회와는 달리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후배들을 이끌고 경기에 나서는 것도 새로웠고요." 김수녕은 개인전 준결승에서 후배 윤미진에게 패하며 동메달 결정전에 나섰다. 최옥실(북한)을 누르고 동메달을 땄다. 단체전에서는 윤미진, 김남순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꺾고 금메달을 쐈다. 4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순간이었다.
"6년 만에 활을 잡았지만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개인전 준결승에서 패했을 때는 '아, 내가 금메달까지는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죠. 후배들이 금메달을 따 주니까 오히려 더 자랑스러웠고요. 단체전 금메달을 땄을 때는 '아, 내가 잘했구나'하고 웃게 되더라고요.(웃음)" 그렇게 신궁은 돌아왔다.

이듬해에도 김수녕은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목 부상은 결국 현역 선수의 마침표를 찍게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서울올림픽 개인전 금메달이죠. 유일한 개인전 금메달이기도 하고요. 한국인 선수 중 첫 올림픽 2관왕을 했던 대회고요. 많은 분들이 그 기록을 기억하시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묻자 예상 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결승전은 아니고요. 시드니올림픽 개인전 예선이요. 36발씩 2회를 쏘잖아요? 모든 선수들이 일렬로 서서 경기를 하는데요. 당시 1라운드가 끝났는데 이탈리아 선수가 1위고 우리 선수들 3명이 2,3,4위였어요. 이대로 끝나면 국내 언론들은 '여자 양궁의 위기'라고 보도를 하실 것 같더라고요.(웃음) 남은 36발을 정말 혼을 다해서 쏜 것 같아요. 가장 집중을 했고요. 이탈리아 선수를 이겨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결국 1위를 했죠"

김수녕은 2004년부터 양궁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서 후배들의 활약을 바라보며 현장의 감동을 안방에 전달하고 있다. 전문 강사로도 활약하며 기업과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올 초에는 경희대 체육대학원 스포츠산업경영 분야의 석사학위를 취득하며 스포츠 행정가로 내실을 다지고 있다. 2009년 대한양궁협회 이사로 위촉됐고 최근에는 체육인재육성재단의 지원을 받아 국제기구 경험을 하게 됐다. FITA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할 생각을 갖고 있다.
김수녕의 삶에는 정답이 없었다. 정답이 아닌 행복을 선택했다. 긍정의 에너지를 자기의 무기로 만들었다. 20세기 최고의 궁사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긍정의 에너지는 내면의 잠재력을 이끌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신조처럼 인생 가운데 어려운 시기는 찾아올 수 있지만 지혜로운 사고의 전환으로 더 나은 미래를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신궁의 역사'는 새로 쓰이고 있다. 매 순간 긍정의 에너지를 벗 삼아 살아가고 간혹 영점 조준이 잘못돼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오조준으로 과녁 한 가운데를 맞출 수 있는 경험도 쌓았다. 김수녕, 신궁의 아름다운 행보가 그려지는 이유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배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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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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