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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서윤에 거는 기대, 한국 여자육상에 필요한 ‘성장 시스템’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육상 천재’의 탄생보다 중요한 것, 유망주 지키는 시스템
중3 소년체전 이후 성장 공백, 연맹이 그리는 새로운 육성체계


지난달 '제7회 전국초·중·고등학교 학년별 육상경기대회' 100m 경기에서 11초76의 기록으로 자신이 세운 여중부 한국기록을 다시 경신한 왕서윤. /대한육상연
지난달 '제7회 전국초·중·고등학교 학년별 육상경기대회' 100m 경기에서 11초76의 기록으로 자신이 세운 여중부 한국기록을 다시 경신한 왕서윤. /대한육상연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이 모두 끝났다. 한국 육상은 이번 대회 동메달 3개에 그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기록 3개를 작성하며 새로운 가능성도 확인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동안 국내에서는 여자 육상의 미래가 펼치는 기록 향연으로 가슴이 들떴다. 육상 단거리 유망주 왕서윤(14·서울체중)이 여중부 100m 한국기록을 또 갈아치웠다. 지난달 18일 대한중고육상연맹 '제7회 전국 초·중·고 학년별 육상경기대회' 여중부 100m에서 11초 76을 기록해 우승했다. 11초 76은 올해 국내 여자 100m에서도 가장 빠른 기록이다. 21일에는 여중 2학년부 200m 결승에서도 24초 31의 부별 한국기록으로 우승했다. 올해에만 무려 7차례나 여중부 한국신기록을 다시 썼다.

한국 여자 육상 단거리 종목은 오랫동안 깊은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영숙이 1994년 세운 여자 100m 한국 최고 기록(11초 49)은 30년 넘게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고, 성인부 정상급 선수들의 기록마저 11초 7~8대에 머물며 11초 2~3대까지 내려오는 아시아 정상권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그러나 2026년, 한국 육상계는 중학교 2학년 왕서윤의 등장으로 전에 없던 설렘에 휩싸여 있다. 왕서윤은 지난 5월 소년체전 100m에서 11초 92를 찍으며 28년 만에 대회 신기록을 세운 데 이어, 불과 수개월 만에 11초 76까지 단축했다. 200m(24초 31) 역시 종전 최고기록을 크게 앞당겼다. 한국 여자 단거리의 오랜 침체를 생각하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성장세다.

양예빈(왼쪽에서 세번째)이 계룡중3년 시절이던 2019년 ‘48회 추계 전국중·고등학교 육상경기대회' 여자 중학교 400m에서 55초35로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뒤 수상하는 모습./ 뉴시스
양예빈(왼쪽에서 세번째)이 계룡중3년 시절이던 2019년 ‘48회 추계 전국중·고등학교 육상경기대회' 여자 중학교 400m에서 55초35로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뒤 수상하는 모습./ 뉴시스

◆ 유망주 성장의 구조적 공백

하지만 찬사가 커질수록 육상계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나온다. 압도적인 기량으로 '육상 천재'라 불렸으나 고교 진학 후 부상과 훈련 공백을 겪으며 성장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양예빈(22·정선군청)의 사례가 여전히 선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 엘리트 학원 스포츠의 구조에는 유망주를 방치하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중학교 3학년 선수들이 고교 진학을 앞두고 겪는 공백기다. 학기 초에 진학이 사실상 결정된 중3 선수들은 5월 소년체전 등 주요 중학 대회를 마치고 나면, 이듬해 고교 입학 전까지 기존 학교와 진학 예정 학교 어느 쪽에서도 지속적인 훈련을 책임지기 어려운 시기가 발생한다. 중학교는 진학이 확정된 3학년보다 내년 성적을 낼 1·2학년에 지도 역량을 집중하고, 고등학교는 아직 입학 전인 학생을 지도할 법적·제도적 명분(안전사고 책임 등)이 없어 손을 놓고 있다.

왕서윤(오른쪽)이 '제7회 전국초·중·고등학교 학년별 육상경기대회' 여중 2학년부 200m 결승에서 역주하고 있다./ 대한육상연맹
왕서윤(오른쪽)이 '제7회 전국초·중·고등학교 학년별 육상경기대회' 여중 2학년부 200m 결승에서 역주하고 있다./ 대한육상연맹

◆ 기록보다 먼저 살펴야 할 성장하는 몸

특히 성장기 여자 선수는 2차 성징을 거치면서 체성분과 신체 능력에 변화가 나타날 수 있는 만큼, 이에 맞는 훈련 조정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체형이 달라지면 달리기 동작과 관절에 가해지는 부하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장 과정의 변화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과거의 훈련 방식과 기록을 그대로 적용하면 부상 위험이 커질 수 있고, 성장 잠재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선수와 학부모가 개인 비용으로 사설 센터를 찾거나 스스로 훈련을 이어가야 하는 이 시기에 체계적인 관리가 끊기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성장기에 필요한 피지컬 트레이닝과 부상 관리가 중단될 수 있고, 경기 경험과 훈련의 연속성이 끊기면서 기량과 심리적 안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유망주의 성장을 선수의 재능과 개별 지도자의 역량에만 의존하는 방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의 기록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몸의 변화를 함께 살피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의 기록과 훈련 방식을 기준으로 삼기보다 성장 단계에 따라 달라지는 체성분과 근력, 움직임의 변화를 살피고 그에 맞춰 훈련을 조정해야 한다. 여기에 중학교 3학년 이후 고교 진학까지 발생하는 훈련과 관리의 공백을 메우는 연속성 있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나아가 ‘국내용 최고 선수’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수준에 도전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성장 경로까지 설계해야 한다.

지난달 열린 '제7회 전국 초·중·고 학년별 육상경기대회'에서 여초 6학년부 100m 결승에 출전한 최은서(충남온양풍기초· 맨왼쪽)도 뜻깊은 신기록을 세웠다. 12초 46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며 여자 초등학교부 한국기록을 경신했다./대한육상연맹
지난달 열린 '제7회 전국 초·중·고 학년별 육상경기대회'에서 여초 6학년부 100m 결승에 출전한 최은서(충남온양풍기초· 맨왼쪽)도 뜻깊은 신기록을 세웠다. 12초 46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며 여자 초등학교부 한국기록을 경신했다./대한육상연맹

◆ 연맹이 만들어갈 성장의 연속성

다행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대한육상연맹이 아시안게임 이후 왕서윤을 비롯한 신진 세대 중심의 여자 육상 육성체계를 본격화하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연령대별로 유소년 선수들의 성장 단계를 관리하고, 각 단계에 맞는 경험과 훈련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구상이다. 반가운 신호다.

그 과정에서 중학교 3학년 유망주들이 고교 진학을 앞두고 겪는 공백기를 연맹 차원에서 관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대한육상연맹 백형훈 전무에 따르면, 육성 대상 유망주들이 고교 진학 전까지 훈련과 경기 경험을 이어갈 수 있도록 연맹 차원에서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이와 함께 성장기 선수에 대한 스포츠과학적 관리도 필요하다. 백 전무 역시 2차 성징 이후 체성분과 신체 능력의 변화로 여자 선수들의 파워와 순발력이 떨어질 수 있는 만큼, 성장 단계에 맞는 관리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성장 과정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측정하고, 그에 맞춰 훈련을 조정하는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다.

◆ 더 일찍, 더 넓은 무대로

연맹은 또 어린 유망주들을 국제 연령별 유스 대회에 적극 파견해 어린 시절부터 국제무대 경험을 쌓도록 하는 한편, 소속팀 지도자도 함께 동행시키겠다는 구상도 내비쳤다. 국내 대회만으로는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경기 환경과 경쟁 수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유소년 선수의 성장에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동시에 현장 지도자에게도 다른 훈련 환경과 경기 방식을 접할 기회를 제공해 선수와 지도자가 함께 성장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어린 유망주의 성장에 필요한 것은 성장의 연속성과 더 넓은 무대다. 왕서윤이라는 대형 유망주의 등장은 한국 여자 육상에 찾아온 귀한 기회다. 그의 발걸음이 과거 유망주 잔혹사의 또 다른 사례로 남을지, 30년 넘게 이어진 한국 여자 100m의 벽을 넘어 부흥의 신호탄이 될지는 결국 그를 둘러싼 어른들과 육상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단기 성과를 재촉하기보다 성장의 시간을 보장하고, 국내 무대에 머물기보다 세계와 경쟁하게 하며, 재능에 기대기보다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것. 그것이 왕서윤을 지키면서 한국 여자 육상의 다음 세대를 여는 길이다.

지난달 열린 '제7회 전국 초·중·고 학년별 육상경기대회'에서 여초 6학년부 100m 결승에 출전한 최은서(충남온양풍기초· 맨왼쪽)도 뜻깊은 신기록을 세웠다. 12초 46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며 여자 초등학교부 한국기록을 경신했다./대한육상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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