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지경'의 몰입이 낳은 기적, 안세영이 증명한 '마음의 힘

[더팩트 | 박순규 기자] 배드민턴 여자 단식 세계랭킹 1위 안세영(24·삼성생명)이 또 한 번 세계 배드민턴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연출했다. 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2026 BWF(세계배드민턴연맹) 월드투어 슈퍼 1000 인도네시아 오픈 준결승전. 안세영은 숙적 천위페이(중국·세계 4위)를 맞아 3게임 한때 7-17, 무려 10점 차까지 뒤처지며 패색이 짙었다. 관중석에서도, 중계화면을 보던 팬들도 사실상 경기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안세영은 무서운 뒷심으로 16-20 매치포인트 상황을 지워버리며 23-21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게임 스코어 2-1(21-17, 19-21, 23-21)로 결승에 진출한 안세영의 1시간 18분 승리는 각본 없는 드라마이자 인간 정신력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이번 승리는 안세영과 천위페이의 단순한 기량 차이를 넘어, ‘한계에 직면했을 때 정신을 어떻게 통제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천위페이는 세계 4위의 절대 강자이자 안세영을 가장 잘 아는 라이벌이다. 기술과 전술, 신체 조건에서 결코 안세영에게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3게임 중반까지는 천위페이의 정교한 공격과 노련한 경기 운영이 안세영을 압도했다. 그러나 승리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두 선수의 명암을 가른 것은 ‘숫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천위페이는 눈앞의 승리, 즉 '21점'이라는 숫자에 마음이 흔들렸다. 경기 후 "이기고 싶었지만 세밀하지 못했다"는 그의 고백처럼, 승리에 가까워질수록 역설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세밀함이 무너졌다. 반면 안세영은 달랐다. 10점 차의 절망적인 열세 속에서도 그는 전광판을 바라보지 않았다. 경기 후 안세영은 "점수를 보지 않고 계속해서 했더니 경기가 끝나있더라"고 했다. 눈앞의 스코어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날아오는 셔틀콕 하나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의 몰입, 이것이 바로 기적의 원동력이었다.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그의 저서에서 '달생(達生)'의 지혜를 논하며 외물(外物)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을 강조했다. 장자는 활을 쏠 때 기와나 흙덩이를 걸고 쏘면 기가막히게 잘 쏘던 자가, 황금을 걸고 쏘면 마음이 혼미해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했다. 상품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자신의 기술에 몰입하지 못하는 '외중자질(外重者拙, 외부의 것에 비중을 두면 옹졸해진다)'의 이치다. 천위페이는 결승행이라는 '황금'을 바라보느라 손끝이 떨렸고, 안세영은 승패라는 외물을 완전히 비워내고 셔틀콕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과거 수많은 스포츠 영웅들이 위대한 역전극을 펼칠 때도 늘 이와 같은 몰입의 비밀이 존재했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명언을 남겼다. 안세영은 이 말을 코트 위에서 온몸으로 증명해냈다. 체력이 고갈되어 코트 위에 주저앉으면서도 끝까지 셔틀콕을 따라가 받아아내는 끈질긴 수비, 상대의 결정적인 푸시 공격을 본능적으로 걷어내는 반사신경은 점수판을 계산하는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오직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순수한 몰입 상태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저력이다.
우리는 흔히 숫자로 세상을 평가하고, 남은 점수와 격차를 보며 지레 포기하곤 한다. 그러나 안세영은 인생의 진정한 승부는 스코어보드가 가리키는 숫자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내면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웅변했다. 10점 차의 열세를 뒤집고 숙적을 울린 안세영의 투혼은, 미래의 불확실성과 현실의 높은 벽 앞에 좌절하는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준다. 점수를 보지 않고 묵묵히 제 리듬을 찾아간 안세영의 '무아(無我)의 배드민턴'이야말로 그가 세계 일인자의 자리를 지키는 진정한 비결이자,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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