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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스포츠뒤집기]20년 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북한 선수단은






북한이 12년 만에 출전한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 개회식 장면. / 올림픽 홈페이지 캡처
북한이 12년 만에 출전한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 개회식 장면. / 올림픽 홈페이지 캡처

꼭 20년 전에 열린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하계 대회에 북한은 1980년 제22회 모스크바 대회 이후 12년 만에 출전했지만 2012년 제30회 런던 대회가 열리고 있는 현재 역대 올림픽 최고 성적인 금메달 4개와 동메달 5개를 차지했다. 종합 순위 16위로 17위인 일본(금 3, 은 8, 동11)에 앞섰다. 장웅 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을 단장으로 한 북한은 12개 종목 64명의 비교적 적은 선수단을 파견했으나 알뜰하게 메달을 거둬들였다.

그 무렵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갖고 있던 체조 남자 뜀틀의 배길수, 프로 복서를 떠올리게 하는 다부진 경기 내용을 보인 복싱 플라이급의 최철수, 전략 종목이었던 레슬링 자유형 48kg급의 김일과 52kg급의 리학선이 북한이 차지한 금메달의 주인공들이다.

한국도 레슬링에서 북한과 엇비슷한 성적을 올렸다. 한국은 금메달리스트인 자유형 74kg급의 박장순, 그레코로만형 57kg급의 안한봉 등 4명, 북한은 두 금메달리스트 등 3명의 레슬링 메달리스트를 이 대회에서 낳았다. 레슬링 경기가 열린 국립카탈루니아체육대학 체육관에서는 연일 태극기와 인공기가 올라갔다.

이 대회가 열리기 1년 전인 1991년 남북한은 탁구와 청소년 축구 단일(유일)팀 ‘코리아’를 만들어 탁구는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 축구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8강의 성적을 올렸다. 스포츠가 남북 교류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8월 7일 국립카탈루니아체육대학 체육관 앞 잔디밭에 기자들과 오전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선수촌과 기자촌으로 가는 순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술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웬 술 냄새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북한 선수 몇 명과 코치가 있었다. 오전에 벌어진 레슬링 자유형 57kg급 3위 결정전에서 터키의 레므지 무사오굴라를 이긴 김영식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아, 그렇습네까. 반갑습네다. 앉으시라요.” 북한 코치가 반갑게 맞았다. “이번 대회에서 북쪽 성적이 비교적 좋네요. 축하합니다. 그런데 웬 술 냄새입니까.” “술 냄새가 납네까. 죄송합네다. 제가 어제 조금 많이 마신 것 같습네다. 죄송합네다.” 코치 옆에 앉아 있던 김영식이 머리를 주억거리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금까지 술이 깨지 않을 정도로 마셨다면 꽤 많이 마셨을 텐데.” 이때부터 김영식의 하소연이 시작됐다.

잠깐 김영식의 화려한 선수 경력을 소개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48kg급 금메달리스트인 김일과 함께 1990년대를 앞뒤로 북한 레슬링 자유형의 간판 선수로 활약한 김영식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전까지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 1위, 1987년 세계선수권대회 2위(이상 52kg급), 1989년 세계선수권대회 1위(57kg급),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1위(52kg급) 등 52kg급과 57kg급을 오가며 세계무대를 휩쓸었다. 북한이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했다면 금메달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1987년 세계선수권대회 당시 김영식이 소련의 블라디미르 토그조프와 경기를 펼치고 있다. / 유튜브 동영상 캡처
1987년 세계선수권대회 당시 김영식이 소련의 블라디미르 토그조프와 경기를 펼치고 있다. / 유튜브 동영상 캡처

김영식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는 57kg급으로 출전했다. 김영식으로서는 전성기인 1988년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린 게 무척이나 아쉬웠을 것이다. 국제 무대 성적은 화려했지만 올림픽 메달이 없는 김영식은 바르셀로나에서 꼭 금메달을 따고 싶었다. 김영식은 평양을 떠나올 때 애인에게 굳게 약속했단다. “꼭 금메달을 따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김영식의 애인은 평양 시내에 쓸 만한 살림집도 마련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 꿈에 부풀어 있었을지 모르겠다.

여자 유도의 계순희, 여자 마라톤의 정성옥 등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은 후배 선수들보다 먼저 ‘인민체육인’이 될 만한 실력을 갖춘 김영식이었다. 김영식의 애인은 김영식이 평양을 떠나올 때 짐 꾸러미 깊숙이 무엇인가를 집어넣었다. 조금씩 마시고 힘을 내 금메달을 따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뱀술이었다.


대회가 시작됐다. 컨디션도 좋았고 수분 조절(체중 조절)도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김영식의 금메달 꿈은 조 편성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레슬링 강국인 독립국가연합(EUN·옛 소련) 선수와 한 조가 됐고, 조 1위 결정전에서 그 선수에게 져 3위 결정전으로 밀려났다. 가슴이 터질 노릇이었다. 선수촌에 돌아왔으나 경기 장면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뱀술 한 병을 몽땅 마셔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술 냄새를 풍기며 매트에 올랐다. 터키 선수는 고약한 술 냄새가 역겨웠는지 슬슬 꽁무니를 빼다 맥없이 무너졌다.


“나이가 꽤 됐지요. 운동을 계속할 건가요.” “아니오, 이젠 그만둬야겠시요. 평양에 돌아가면 지도원 공부를 할까 합네다.”

스포츠서울에 북한 선수 은퇴 관련 단독 보도가 나가게 된 사연이다.

북한은 이번 대회에도 10개 종목 51명의 소수 정예 선수단이 출전해 31일 현재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의 알찬 결실을 얻고 있다. 유도는 안금애 혼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들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사연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런던에서 들어오는 소식을 보면 북측 선수와 남측 기자가 잔디밭에 앉아서 터놓고 얘기할 분위기는 아닌 듯하다. 20년 전 올림픽에서 독일은 영문 표기로 ‘United Germany'를 쓰고 있었다. 동·서독은 이에 앞서 1956년 멜버른 대회부터 1964년 도쿄 대회까지 독일 단일팀을 꾸려 올림픽에 나섰다.

더팩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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