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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스의 106분, '절친' 이강인 시간을 깨웠다 [박순규의 창]
낯선 땅의 어린 이강인에게 먼저 손 내민 유소년팀 주장, 세계 정상에서 친구의 새 도전을 비추다

스페인의 페란 토레스가 20일 아르헨티나와 2026 북중미 월드컵 결승전 연장 후반 1분 결승골을 넣은 후 환호하고 있다./뉴저지=AP.뉴시스
스페인의 페란 토레스가 20일 아르헨티나와 2026 북중미 월드컵 결승전 연장 후반 1분 결승골을 넣은 후 환호하고 있다./뉴저지=AP.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축구 인생을 바꾸는 데는 때로 단 한 번의 기회면 충분하다. 페란 토레스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스페인과 아르헨티나가 맞붙은 2026 북중미 월드컵 결승전. 0-0의 팽팽한 균형이 이어지던 연장 후반 1분, 토레스가 아르헨티나의 골망을 흔들었다. 106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스페인은 1-0으로 승리하며 2010년 남아공 대회 이후 16년 만에 통산 두 번째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토레스의 결승골은 한국 팬들에게도 남다른 울림을 안겼다. 그의 축구 인생 한편에 한국 대표팀의 에이스 이강인이 있기 때문이다.

두 선수는 발렌시아 유소년팀에서 함께 꿈을 키웠다. 2000년생 토레스는 이강인보다 한 살 많았다. 같은 연령대 선수들 가운데 주장을 맡을 만큼 일찍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은 토레스는 낯선 스페인에 건너온 어린 동양인 선수를 경쟁자로만 대하지 않았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환경에서 훈련해야 했던 이강인이 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먼저 손을 내밀고, 훈련장 안팎에서 살뜰하게 챙겼다.

어린 이강인에게 토레스는 단순한 동료가 아니었다. 자리를 다투는 경쟁자이면서도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준 형이자 울타리였다.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려면 재능과 노력뿐 아니라 자신을 믿어주는 동료 한 명이 필요하다. 토레스는 이강인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다.

이강인이 11일(현지 시간) 멕시코 사포판의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에서 체코를 2-1로 꺾은 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이강인은 후반 22분 황인범의 동점 골에 도움을 기록했다./사포판=AP/뉴시스
이강인이 11일(현지 시간) 멕시코 사포판의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에서 체코를 2-1로 꺾은 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이강인은 후반 22분 황인범의 동점 골에 도움을 기록했다./사포판=AP/뉴시스

두 사람이 프로 무대에 오른 뒤에도 그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특히 이강인이 발렌시아에서 출전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팀 안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토레스는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2020년 발렌시아를 떠나며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이강인을 매우 좋아한다. 이강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며 자신과 루벤 소브리노가 이강인을 많이 도왔다고 밝혔다. 이어 "이강인은 위대한 선수가 될 것"이라며 발렌시아가 자신에게 했던 실수를 이강인에게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구단에 직언했다.

당시 토레스는 이강인이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또 어린 선수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이나 낙인이 아니라 ‘애정과 신뢰’라고 강조했다. 자신도 구단 내부의 압박과 비판으로 고통을 겪었던 만큼, 같은 길을 걷는 후배가 홀로 상처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이다.

프로 세계에서 동료의 어려움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의 입지와 구단과의 관계까지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토레스는 그 부담을 감수하고 이강인의 편에 섰다. 유소년 시절에는 주장으로 어린 이방인의 적응을 도왔고, 프로에 오른 뒤에는 이강인이 흔들릴 때마다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그의 잠재력을 세상에 알렸다.

발렌시아는 2019년 10월 15일 토레스와 이강인이 골든보이 최종 후보 20명에 함께 선정됐다는 기사와 함께 이강인과 토레스 사진을 게시했다./발렌시아
발렌시아는 2019년 10월 15일 토레스와 이강인이 골든보이 최종 후보 20명에 함께 선정됐다는 기사와 함께 이강인과 토레스 사진을 게시했다./발렌시아

그러나 토레스 자신의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발렌시아를 떠나 맨체스터 시티와 바르셀로나를 거치는 동안 치열한 주전 경쟁을 견뎠다. 빠른 발과 득점력을 갖추고도 확고한 주전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결정력과 경기 기복을 이유로 비판받았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출전 시간이 짧아도 자신의 차례를 준비했고, 마침내 생애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조국에 월드컵을 안겼다. 결승전의 벤치는 좌절의 자리가 아니라 주인공으로 뛰어오르기 직전의 대기실이었다.

이강인의 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발렌시아에서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마요르카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파리 생제르맹에서는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며 경험과 우승 경력을 쌓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화려한 팀의 일원이 아니라 경기의 중심에 서는 일이다.

‘절차탁마’라는 말이 있다. 옥과 돌을 자르고 쪼고 갈고 닦아야 비로소 빛나는 보석이 된다는 뜻이다. 두 선수는 서로를 격려하면서도 냉혹한 경쟁을 견디며 자신의 축구를 다듬었다. 우정은 경쟁을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힘이 됐다.

발렌시아 훈련장에서 함께 공을 차던 두 소년 가운데 한 명은 이제 세계 챔피언이 됐다. 그러나 먼저 핀 꽃이 봄을 독차지하지는 않는다. 토레스의 106분은 한 친구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린 이강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친구가 이제 세계 정상에서 보내는 격려다.

"나는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내 시간을 만들었다. 이제는 네 차례다."

토레스의 결승골은 어쩌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적이 유력한 이강인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또 하나의 휘슬인지 모른다.

발렌시아는 2019년 10월 15일 토레스와 이강인이 골든보이 최종 후보 20명에 함께 선정됐다는 기사와 함께 이강인과 토레스 사진을 게시했다./발렌시아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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