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2026 북중미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은 한국 축구에 큰 충격을 남겼다. 1승2패, 최종 34위라는 성적표도 뼈아프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대회 직후 감독과 대한축구협회장이 잇따라 물러나면서 한국 축구의 중심축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단순한 사람의 공백이 아니다. 원칙과 시스템, 그리고 신뢰의 공백이다.
나는 약 55년 동안 축구와 함께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배우는 입장이었고, 국가대표가 된 뒤에는 책임과 희생을 배웠다. 지도자가 되어서는 성적과 선수 육성을 고민했고, 행정가가 되어서는 조직 운영과 거버넌스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공기업과 민간기업, 공공기관과 문화단체를 두루 경험한 것도 큰 자산이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조직의 본질은 분명하다. 조직은 시스템이 만들고, 사람은 문화를 만든다.
포스코에서 생활하며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원칙과 시스템의 가치였다. 조직은 개인보다 시스템이 우선해야 한다. 업무는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권한을 행사한 사람은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완벽한 조직은 없지만 판단의 기준과 책임의 주체가 분명하면 구성원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다.
반면 민간기업에서는 성과와 경쟁, 빠른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경험했다. 그러나 능력보다 개인적 관계나 성향이 인사에 영향을 미치면 조직은 병들기 시작한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만 곁에 두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다른 의견이 사라지고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을 기회도 줄어든다.
공공기관과 문화단체는 더욱 엄격해야 한다. 청렴과 공정성을 앞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외부 청탁이나 실권자의 영향력이 절차보다 앞서는 경우가 있다. 책임보다 관계가 우선되고 주인의식이 약해지면 결정은 늦어지고 책임지는 사람도 사라진다.
대한축구협회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공식 기구의 역할과 절차적 정당성이 흔들렸고,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는지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과정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좋은 결과가 나와도 논란이 남고, 실패했을 때는 조직 전체가 흔들린다.
세상 어디에도 인간관계가 없는 조직은 없다. 지연과 학연, 직연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조직 운영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관계는 신뢰를 만드는 윤활유가 될 수는 있지만 실력과 공정성을 대신하는 엔진이 될 수는 없다.
한국 축구는 이제 사람 몇 명을 교체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감독과 주요 임원을 선임하는 기준과 절차를 명확히 하고,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은 평가에서 빠지며, 결정한 사람이 결과에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반대 의견을 배척하지 않고 조직을 위한 충언으로 받아들이는 문화도 필요하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고 지도자는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정한 기준과 책임 있는 문화가 살아 있는 조직은 실패를 성장의 자산으로 바꿀 수 있다. 좋은 조직은 좋은 사람 한 명에게 의존하는 조직이 아니다. 좋은 제도가 독단을 막고, 공정한 사람이 그 제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공동체다.
회장과 감독의 공백은 언젠가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원칙과 신뢰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한국 축구가 다시 출발하려면 새로운 영웅을 찾기 전에 공정하게 사람을 선택하고, 권한을 통제하며, 결정에 책임지는 시스템부터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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