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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경 축구] '지도자 인생'을 건 황선홍의 '도박', 어떻게 통했나

  • 스포츠 | 2024-03-28 00:00

올림픽축구대표팀 감독과 A대표팀 임시 감독 '겸업' 한 달 성공
태국과 3월 A매치 1승1무...2024 WAFF U-23 챔피언십 '우승'도


누가 지난달 물리적 충돌을 빚은 선수들이라고 믿겠는가. 한국축구대표팀의 '캡틴' 손흥민과 이강인이 26일 태국과 2026 북중미 월드컵 2차예선 C조 4차전에서 추가골을 합작한 뒤 포옹하며 기뻐하고 있다./방콕=신화.뉴시스
누가 지난달 물리적 충돌을 빚은 선수들이라고 믿겠는가. 한국축구대표팀의 '캡틴' 손흥민과 이강인이 26일 태국과 2026 북중미 월드컵 2차예선 C조 4차전에서 추가골을 합작한 뒤 포옹하며 기뻐하고 있다./방콕=신화.뉴시스

'세상은 요지경'처럼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많은 곳이 스포츠 세계, 특히 축구계다. 오죽하면 '공은 둥글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어디로 구를지 모르는 공처럼 진행 방향을 전혀 알 수 없고, '각본 없는 드라마'란 수식어가 자주 인용되는 곳이 바로 축구 세상이다. 때로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또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는 축구계의 주요 이슈와 화제들을 오랫동안 축구계와 함께한 기자의 주관적 시각으로 조명한다.<편집자 주>

[더팩트 | 박순규 기자] 골망이 흔들리는 순간, 바로 그 장면이 나왔다. 절묘한 스루패스로 태국 수비벽을 무너뜨린 이강인(23·파리 생제르맹)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골키퍼까지 뚫는 왼발 슛으로 추가골을 기록한 손흥민(31·토트넘)과 마주 보며 포효한 뒤 그의 품에 뛰어들며 포옹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바로 그 장면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26일 오후 9시 30분(한국시간) 킥오프한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 C조 4차전. 한국과 태국의 '리턴 매치'가 열린 방콕의 라자망갈라 스타디움에서는 '이강인 도움-손흥민 골'이란 환상적 장면으로 그동안 한국 축구의 발목을 잡아온 갈등과 분열이 녹아내렸다.

 '캡틴' 손흥민이 추가골을 기록한 순간, 도움을 준 이강인과 마주보며 하나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AFC
'캡틴' 손흥민이 추가골을 기록한 순간, 도움을 준 이강인과 마주보며 하나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AFC

지난 2월 2023 카타르 아시안컵 이후 한국축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하극상 논란', 이른바 '탁구 게이트'로 불린 이강인과 손흥민의 물리적 충돌 후유증이 마침내 치료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한국 축구를 제 자리로 돌려 놓겠다"는 황선홍 임시 감독의 다짐이 성공적으로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사실 외국 언론을 통해 '캡틴' 손흥민의 지시에 반발한 이강인의 '하극상 논란'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이강인의 대표팀 소집은 요원해 보였다. 장유유서와 위계질서의 유교 문화가 잔존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더구나 한국 축구의 최고 자랑인 '캡틴' 손흥민에게 대들었다는 것은 대다수 팬들에게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팬들을 분노케한 '탁구 게이트'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불명예스런 중도 하차를 낳았고 올림픽축구대표팀을 맡고 있던 황선홍 감독이 A대표팀의 임시 사령탑까지 맡게 되는 계기가 됐다. 4월 파리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U-23 아시안컵을 준비하는 황선홍 감독 처지에선 중차대한 대회를 앞두고 혼돈의 A대표팀 사령탑을 겸임하는 것이 무리였지만 그는 기꺼이 '독이 든 성배'를 손에 쥐었다.

태국과 '리턴 매치'에서 원정 경기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3-0 완승을 끌어낸 황선홍 감독./KFA
태국과 '리턴 매치'에서 원정 경기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3-0 완승을 끌어낸 황선홍 감독./KFA

당시 황선홍 감독은 새롭게 구성된 전력강화위원회(위원장 정해성)의 제안을 받은 지 하루 만에 3월 A매치 2경기 임시 감독직을 수락했다. 이를 두고 여러 말들이 나돌았지만 황선홍 감독은 태국과 2연전을 1승 1무로 마무리하면서 성공적으로 소임을 마쳤다. 또한 수석코치에게 지휘봉을 맡긴 올림픽축구대표팀은 27일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열린 2024 WAFF(서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에서 호주를 꺾고 우승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어느 한 팀의 성공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결과적으로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어느 하나라도 실패했다면 비난의 표적이 되기 십상인 일종의 도박이었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으로 쌓아올린 지도자 커리어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판이었다. 상식적으로 놓여진 상황만 보면 성공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선홍 감독이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고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선배로서의 진정성이 후배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황선홍 감독은 지도자이기 이전에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레전드 스트라이커'다. 홍명보와 함께 1990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4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한 황선홍 감독은 선수 시절 지독한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에 기여하며 14년 동안 국가대표로서 한국 축구와 흥망성쇠를 함께했다.

후반 3-0 쐐기골로 자신의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한 박진섭(가운데)이 감격적인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방콕=KFA
후반 3-0 쐐기골로 자신의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한 박진섭(가운데)이 감격적인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방콕=KFA

이 같은 여정을 통해 태극마크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선홍 감독이 위기의 한국 축구를 구원하기 위해 총대를 멘 사실을 후배 선수들이 어찌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황선홍 감독은 선수 시절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리그 볼리비아전 당시 결정적 찬스를 놓쳐 온갖 비난에 시달린 경험을 갖고 있다. 비록 2002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폴란드전에서 4강 신화의 포문을 여는 한국의 첫골을 터뜨리며 '비운의 스트라이커'란 수식어를 떨쳐버렸지만 대표 선수로서의 영광과 고통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낀 선수로 꼽힌다.

황 감독은 실제로 한시적 대표팀 감독을 맡자마자 한국 축구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보이며 재건의 씨를 뿌렸다. 한국을 자주 비운 클린스만 감독과 달리 짧은 시간 동안 K리그 무대를 누비며 선수들의 컨디션을 점검했고 33세의 스트라이커 주민규를 발탁하는 용병술을 통해 누구라도 실력이 되면 언제든지 대표팀에 소집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줬다. 특히 한국축구대표팀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한 '이강인 사태'를 해결하는 데도 앞장섰다.

아마 황선홍 감독이 아니었으면 이강인 문제가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얼마나 더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황선홍 감독의 진짜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걸어온 선수와 지도자로서의 성정을 볼 때 임시 사령탑을 맡은 배경에는 한국 축구의 자산인 이강인 문제를 자신의 손으로 풀겠다는 마음가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황선홍 감독은 태국과 2연전을 앞두고 이강인의 대표팀 소집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이강인을 23인의 대표팀 명단에 올렸다.

손흥민(왼쪽)이 2월 21일
손흥민(왼쪽)이 2월 21일 "이강인의 실수를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팬들에게 당부하면서 인스타그램에 글과 함께 올린 런던의 '투샷'./손흥민 인스타그램

누군가 욕을 먹어야 한다면 자신이 감당하고, 이강인으로부터 촉발된 대표팀의 분열을 대표팀 선배인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가시화한 셈이다. 황선홍 감독은 임시 감독직을 수락할 당시 "한국 축구가 위기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전력강화위원회의 협조 요청이 왔을 때 고심이 많았다. 어려운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최선을 다해서 한국 축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잘 준비하겠다.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는데 그 첫 단추가 바로 비난을 무릅쓰고 이강인을 소집하는 것이었다.

이강인의 재능은 이번 태국과 2연전에서도 드러났듯이 한국 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갈 자산임에 틀림 없다. 한국이 2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태국과 1차전에서 1-1로 비길 때만 해도 우려가 많았으나 26일 원정 경기에서 3-0의 완승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이강인의 활약이 컸다. 조직력 면에서 보면 태국에 밀린 감이 있지만 클래스가 다른 손흥민과 이강인의 개인 능력으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황선홍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 임시 감독이 2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귀국한 뒤 취재진과 인터뷰를 갖고 있다./인천국제공항=이동률 기자
황선홍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 임시 감독이 2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귀국한 뒤 취재진과 인터뷰를 갖고 있다./인천국제공항=이동률 기자

스타의 진가는 위기를 헤쳐나가는 능력이다. 이강인은 선발로 나선 태국과 원정경기에서 차원이 다른 스루패스로 한국 득점의 활로를 열었다. 전반 이재성의 선제골 역시 이강인의 침투 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었으며 손흥민의 추가골 역시 이강인의 패스가 결정적 기회를 제공했다.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는 패스 하나는 골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이강인이 보여준 것이다.

바로 이강인의 이 같은 재능을 황선홍 감독은 끌어냈고, 대표팀의 다음 감독도 활용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줬다. 또한 그동안의 갈등을 해소하고 한국 축구 대표팀을 한마음 한 뜻의 '원팀'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이강인이 태국과 '리턴매치'에서 손흥민에게 열어준 여러 차례의 결정적 패스는 황선홍 감독의 지휘 아래 한국 축구가 다시 하나됨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강인과 손흥민의 포옹은 '원팀의 하이라이트'였다.

황선홍 감독은 태국과 원정경기를 마친 뒤 "선수들이 하나 된 마음으로 승리로 보답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선수들에게 고맙다는,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한국대표팀의 임시 사령탑에 지명된 지 꼭 한 달, 황선홍 감독은 "국민 여러분의 걱정을 덜어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대표팀을 떠나 올림픽대표팀으로 돌아갔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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