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철·박형남 기자] '주민투표는 박형준' 작품이였다. 친박계에서 주장했다. "일부 친박계 의원들이 주민투표에 거부반응을 보인 것도 박형준 청와대 사회특보의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음모론에 휩쌓이게 된다. 그런데 왜 자신을 지목했는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것이 박형준 청와대 사회특보의 설명이다. 특유의 '낙천주의'도 이 앞에서는 무너졌고, 씁쓸함이 몰려왔다. 때론 화도 났다.
박형준 청와대 사회 특보.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논쟁을 즐겼다. 또 낙천적인 성격 탓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정치 아이콘이기도 했다. 그는 이명박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으로서 이명박 정부의 국정이념(친서민 중도실용, 공정사회, 공생발전)을 창안해 내 '전략가', 그리고 순장조로 정권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핵심 참모로 뿌리내렸다.
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이명박 정부 내에서 핵심 참모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에 대한 음모론과 이명박 정부의 비판 여론 앞에서는 그도 어쩌지 못했다. "원래 약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무엇보다도 동태적 균형감각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인정을 받는 측면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바깥으로는 부드럽고, 안에서는 강하려고 해요. 외유내강을 늘 신조로 삼고 있지요."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더팩트>에서는 이명박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인 박형준 청와대 사회특보를 7일 만났다. 그는 '어린시절 박형준', 그 이후 닥친 아픔 등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늘 행복하다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다"고 박 특보는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 사회특보 일은 어떠한가.
여러가지로 어려운 게 많습니다.
- 박 특보의 경우 라이프 스토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가족 얘기를 잘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얘기 안하는 편이죠.
- 집안 형편은.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때문에 가난하게 생활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움 역시 있었죠. 다만 물질적인 어려움은 아니었어요.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죠.
- 박 특보는 성격은 누구를 닮았는가.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엄격하고, 좀 다른 분들한테 화를 잘 못내세요. 외유내강이라고 할까요. 이런 점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 어린시절 에피소드가 있다면.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대일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언덕을 20분 이상 걸어갔어요. 그리고 당시 대일고는 밤늦게까지 공부시키는 걸로 유명했죠. 그런데 저는 밤 늦은 시간, 깜깜한 곳에서 농구하던 기억이 많이 나네요.
- 어린 시절 농구선수였나.
아마추어 가운데는 굉장히 잘하는 축에 속했어요.
- 그래서 만능스포츠맨으로 불리는 것 같다.
원래 운동을 좋아해요. 국회의원 때도 의원축구단 센터포워드를 맡았어요. 요즘도 청와대에서 매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목요일 점심때마다 청와대 경호처와 함게 농구를 해요.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원로한 선수이면서도 주전으로 뛰고 있어요. 서울시 농구룰에 의하면 20대가 한골을 넣으면 2점, 40대는 3점, 50대는 4점이라네요. 그 부분에 의하면 굉장히 기여도가 높아지는데…. (웃음)
-반면 시련도 있었다. 박계동 복학생협의회장이 이끄는 시회대에 참석해 최루탄에 눈을 맞아 오른쪽 눈을 다치기도 했는데.
대학 시절 교지 편집장을 했어요. 그때가 서울의 봄이었죠. 동북권에서 있는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광화문으로 시위를 하러 가는데 경찰들은 막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시위대 선봉에 섰어요. 고려대학교가 가장 앞에 섰는데 그 앞에 제가 섰기 때문이죠. 경찰의 저지 없이 시청 앞까지 갔는데 그때 백골단을 앞세워서 최루탄 공세가 들어왔어요. 놀란 나머지 도망가다가 A호텔 옆으로 몸을 피했는데 최루탄이 호텔 벽을 치고, 오른쪽 눈으로 튀었어요. 그 자리에서 주저 앉는 순간 다리에도 화상을 입었죠.
- 눈 상태는 어떠한가.
눈에 들어온 게 심각했어요. 그때부터 오른쪽 눈으로 글자를 보지 못해요. 다행히 실명은 안됐지만 신문을 오른쪽 눈으로도 볼 수 없어요. 안경을 써도 보지 못해요. 그 뒤로 불편함을 계속 가지고 있어요.
- 대학시절 미팅문화는 즐겼을 것 같은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대학입학할 때가 78년이었고, 79년이 유신 말기였죠. 부마항쟁, 12.12 사건이 79년에 일어났고, 바로 서울의 봄이었어요. 새로운 권위주의적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학교 내에서 연애는 사치였어요. 대신 대학교 1학년 때는 많이 했어요. 1학년 후반부터 4학년때까지 야학을 했으니까요.
- 야학은 주로 어디서 했나.
서울 도봉구에서 했어요. 당시 생활야학이라고 해서 검정고시 준비하는 학생들이 중심이었어요. 주로 공장에 다니는 직원들이 대상이었죠. 당시 의식화 야학은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검정고시 야학이었죠. 야학을 시작한 뒤로 밤에 시간이 없었어요.
- 그래도 미남형이라 학창시절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
다 대학 때 첫사랑이 있죠.(웃음)
- 박 특보는 전형적인 486세대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재오 특임장관과 함께 민중당에서 활동했다. 계기가 있었다면.
오른쪽 눈이 거의 실명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제가 사격을 못해요. 그래서 면죄를 받았습닌다. 남들보다 2~3년 시간이 있었죠. 그 시간동안 대학원에 진학했고, 중앙일보에 취직했어요. 사실 그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민청학련 활동도 조금했어요. 한마디로 민주화 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죠. 그대 민중당에 참여했던 분들하고도 관계가 있었어요.
다만 민중당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과거 운동권의 골수 좌파와는 분리되어 나온 정당이었어요. 합법적 진보 세력을 꿈꿨죠. 그 정당을 만드는데 도움을 줬어요. 때문에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우리나라는 사회주의를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얘기를 많이 했어요. 논쟁도 많이 했죠. 민중당을 할 때 우리나라에는 진보세력이 가야될 길이 사회민주주의적인 길이라는 생각도 그 당시 많이 바뀌었죠.
특히 공부를 계속하다 보니 사회주의가 좋은 점은 따라야되지만 한국 사회 발전 길 자체가 사회민주주의하고는 맞지 않은 측면이 있고, 국가 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했어요. 어떻게 하면 시민사회를 활성화해서 시민사회 민주주의를 포함해 국가 능력을 키워나가는 방향을 생각했죠. 이때 80, 90년대 생각이 달리진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는데 저는 논쟁을 통해서 생각을 바꿨어요.
- 그때 당시 이재오 특임장관은 강경했나.
민중당은 강경좌파는 아니었어요. 온건합리적 좌파를 꿈꿨던 사람들이죠.
-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기자생활도 하고, 전략가로도 유명세를 탔다. 특히 정권 탄생에 일조했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보람된 일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각 대통령마다 나름대로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명박 정부도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분명히 우리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입을 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국격을 높였고, 각 분야에서 이전에 추진하지 못했던 개혁과제들을 상당부분 진행시킨 측면에서 훗날 평가받을 거에요. 특히 금융위기 극복하면서 우리나라가 가장 극복을 잘했다는 것을 IMF에서도 결론내린 바 있어요. 그 과정에서 산업경쟁력이나 경쟁체질이 다른 나라는 악화된 데 비해 우리나라는 좋아진 측면이 있어요. 이런 점을 보람으로 느끼고 있어요.
-반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좀 더 많은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국정을 하면 참 좋았을텐데…. 그런 점에서 이제 국정운영을 하는데 있어서 오는 불가피함이 있기는 하죠. 타협의 정치가 안되고 있기 때문이죠. 이는 우리나라 문제만은 아니지만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아요.
-대표적인 것은 등록금 문제다.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대학생들이 인지하고 있다. 박 특보가 대학다닐 때도 등록금이 높았는가.
대체로 소 한마리 파는 수준이었습니다. (책임을 돌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지난 정부 때 60%이상 올랐어요. 이명박 정부들어 5%이내로 인상하고 있어요. 계속 누적된 게 높아졌기 때문에 부담이 되는 거죠. 정부도 이를 인식하지만 포퓰리즘으로 해결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에요.
이에 대해선 3가지 원칙이 있어요. ▲대학구조조정을 통한 대학진학율을 낮추기 ▲대학 질 향상 ▲등록금 완화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내년에 대학 등록금 관련 재정을 1조5천억원을 확보하고 있어요. 당장 반값등록금은 시행되지 않더라도 내년에는 등록금 인하 효과는 틀림없이 가져올 겁니다.
- 박 특보도 70년대 후반에 입학해 80년대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은 등록금 문제는 물론 생활 취업 때문에 힘들어 한다. 대학생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합니다. 70~80년대는 너무 전체만 인식하고, 개인은 없었다고 한다면 현재는 개인이 너무 두드러지고,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약해요. 인식의 균형을 잡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국가도 그렇지만 한 개인도 비전을 가지고 움직이는 게 필요해요. 그 꿈을 옛날보다 상황이 어려워서 그런지 몰라도 너무 쪼그라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꿈을 크게 가질 필요가 있고, 인생이 길어진 만큼 기회의 창이 넓어졌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자기 개발이 필요해요. 한 방면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서 도전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더팩트 정치팀 ptoda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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