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 교수의 대하 역사소설 '망국' 목차]
제1권 잃어버린 봄
1. “내가 장차 열석자로 오리라” 2.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나 3. 백장암의 동사섭(同事攝) 4. 인연과보(因緣果報)의 굴레 5. 겨울 땅을 뚫고 움트는 새싹 6. 후지산 때리는 실상사 새벽 종소리 7.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 8. 날개 잘린 비둘기 9. 기인(奇人)의 초상 10. 주인장(主人丈)이라 불러주오 11. 나를 버리는 연습 12.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13. 업(業)은 또 다른 업을 낳고 14. 조선의 메시아 강증산 15. 세상에 온 것은 반드시 돌아간다 16. 해원상생(解寃相生) 17. 거자필반(去者必返)](https://img.tf.co.kr/article/home/2011/07/11/110711_4e1aa7d7581e5.jpg)
서양의 기독교에 비견되는 동양 문명의 축은 불교였다. 불교의 깨달음의 궁극은 바로 미륵불의 도법(道法)이다.
미륵불은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는 미래의 부처요, 구원의 메시아인 것이다. 예수가 전한 하느님이나, 부처가 전한 미륵이나 서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게 증산도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인 듯했다.
박렬은 적잖은 의구심이 일었다. 지구 역사의 탄생 이래로 가장 훌륭한 성인들이 강증산이란 인물이 쓰기 위해 내려 보냈다는 말은 일견 허무맹랑하게까지 들렸다.
특히 통일교 문선명 목사 수제자인 대학 선배한테 언젠가 이와 유사한 주장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증산과 문 목사의 설법이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 내용인지 야릇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문 목사는 4대 성인들의 배우자까지 정하고, 그들이 모두 통일교 교리를 배우고 있다지 않은가? 이미 천상 세계를 문 목사가 모두 통일하고, 명실상부한 메시아로서 이 땅에 강림했다는 주장이다.
당시엔 무슨 엉뚱한 이야기냐, 하고 귓등으로 흘려보냈지만, 지난번 만났던 김승기의 섭리(攝理) 이야기에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겹쳐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어떤 진리나 실체가 있다면 일단 액면 그대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공자님이 이웃 아저씨로 살면 '이웃 공자 몰라 본다'고 하는데 정녕 메시아로 예수가 왔을 때 십자가로 보낸 유대인들처럼 혹시 못 알아봐 모르고 지나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료들을 통해 박렬은 증산이 자신을 '하느님'이나 '천주' 혹은 미륵불, 옥황상제 등에 비유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증산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상제님인 증산이 모든 종교의 궁극적 이상을 실현하고 세계 인류의 생명을 건지시는 참 하느님'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 대목에 이르러서는 백장암에서 만났던 최형주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천부인 도장에 성몽화령 현인범광 교도천사 구묘역영(聖夢化領 賢絪梵光 敎導天使 玖妙亦暎)이라고 적혀 있더랍니다. 어느 스님이 그걸 해석했는데 성인의 꿈이 세상을 건지고자 명령을 내리니, 유교(賢)는 제자리를 찾고 불교(梵)는 제빛을 되찾는다. 기독교(天使)는 부족하니 더 가르쳐서, 구슬을 갈아 묘한 빛을 내게 함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기독교의 차원을 높이고 종교적인 모든 사상을 통일할 수 있는 인물이라야만 새 세상의 정신적인 영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죠.'
증산과 그 도장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렬은 증산이란 인물이 지나치게 환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나이 20살 때 증산은 동학과 인연을 맺었는데, 먼저 이 땅에 보낸 사람이라는 동학 교조 최제우가 그의 존재에 대해 몰랐다는 말인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은 대목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1824년 태어나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고, 증산은 1871년에 태어났으니 물론 시차가 있긴 했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분명 진실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뭔지 모르게 지나치게 와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자료를 펼쳤다.
"......강증산은 세상에 다시 나올 적에 '열석 자로 오리라'고 예언했다. 그 열석 자는 Judge merry Key로 추정할 수 있다....."
아, 열석 자! 그의 화두가 새삼 불거져 나온 것이다. 물론 박렬은 이 부분에 대해 오래 전 읽은 기억이 났다. 자료의 출처를 보니 김지하 시인이 쓴 <사상기행>이란 책이었다. 김지하가 민족 사상, 민중 사상을 찾아 전국을 떠도는 과정에 만난 송명초라는 스님의 일설(一說)이었다.
"일반 재판에서는 법률이, 우주의 일을 재판하는 데는 참된 진리라는 즐거운 열쇠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인간이 바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과 완전한 자유인데 그것을 지닌 것은 진리 이외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사지(萬事知)이다. 그런데 이 만사지를 알아내는 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력이다. 생명력은 인식능력을 발휘하여 인식작용을 하고 인식이 끝나면 하나하나의 사물에 개념을 주어 지식화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칫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사심이 생기는 것이다. 정(精)과 의(義)는 지(智)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과오를 범하기가 쉽다. 지의 참모습은 이성, 즉 칸트의 순수이성이다. 완전히 순수한 이성만으로 정신능력을 작용하면 순수감정, 순수의지가 된다."
박렬은 그의 말이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다고 여겨졌다. 그렇다고 <도전(道典)>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이 모두 왜곡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뭔가 잘못 해석된 부분도 있을 것이고 과장된 부분도 있을 터였다. 그건 이미 <개벽>이라는 책을 통해서 경험한 바 있었다.
"......증산 사상은 우주의 일심을 깨달으라는 사상이 첫째요, 다음은 해원(解寃)사상-오해와 갈등과 투쟁에서 빚어진 원한을 풀어버리는 것인데, 원한을 푼다는 것은 상생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자면 보은 사상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증산 사상은 대각일심(大覺一心)에 바탕을 둔 해원, 상생, 보은사상이다. 모든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고 서로 더불어 살고자 할 때의 보은은 한마디로 말해 내 존재의 바탕, 즉 우리가 비난할 수 있는 선조들까지도 내가 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감사한 마음이 현재와 이웃, 넓게 말해면 우주의 삼라만상을 통틀어 모든 것의 값어치를 손상시키지 않고 완전히 발현시킨다는 최고 경지의 이론이다. 해원하면 이미 보은이요, 상생하면 또한 보은인 것이다. 증산사상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내려온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면 그것이 바로 증산사상이다....."
'동학난으로 인해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을 때 당시의 민중은 실의에 차 있었을 것이다. 후천개벽의 새로운 철학이 필요한 시대였으리라. 동학이 전멸했을 때 동학을 재건하자고 나온 사람이 강증산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동학의 철학으론 불가능했을 터. 워낙 희생이 컸던 때문이겠지. 그래서 수운을 선동학(先東學)이라고 했던 것이고 자신을 후동학(後東學)이라고 했을 게야. 그는 정세개벽이라는 새로운 철학으로 민중 앞에 나타난 것이지. 그렇다면 그는 그저 시민운동가일 수도 있지. 그걸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건 아닐까?'
<도전(道典)>은 신화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이야기들이 많은 편이었다. 그 속에서 후인(後人)들이 그 말의 뜻을 잘못 해석해 정작 숨겨진 진의는 곡해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산 입장에서만 써진 <도전>의 자료들은 박렬에게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뒷사람들이 증산의 말을 잘못 해석한 부분도 있다는 가정의 여지는 남겨두었다. 강증산이라는 인물이 과연 그들이 전하는 상제이며 미륵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흥 종교 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절대자에겐 이적과 만들어진 신화가 있는 법이었다. 그런 측면에서만 본다면 강증산의 경우는 세상이 놀랄 이적도 없었으며 특이한 신화도 없는 편이었다.
다만 증산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전 우주를 놓고 판을 새로 짜는 천지공사를 벌인 일이나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양의 판세를 변화시켰다는 신화가 있을 뿐이었다.
증산의 삶은 굳이 신화라기보다 어딘지 모르게 매우 서민적이고 민중적인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를 명확하게 알려면 동학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박렬이 알고 있는 동학은 그저 민중적이며 우주적 사상이라고 하는 게 전부였다.
박렬은 펼쳐 놓았던 자료들을 하나 둘 챙겨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가 지금 가고자 하는 곳은 금산사였다. '나를 보고 싶거든 모악산 금산사 미륵을 보라'는 증산의 말을 좇아 해석하기 위함이었다. 궁극적으로 '저지 메리 키'라고 해석한 '열석자'와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은 후천개벽의 혈처(穴處)로 알려져 있었다. 원시사회로 문명 전체가 회귀해야 한다는 증산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의 태동지이기도 했다.
박렬은 지금 자신의 입장이 왠지 꼭 계룡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이들이 계룡산을 두고 '불안한 산'이라고 보았다.
박렬 역시 지난날 '산기행(山紀行)' 특집을 맡아 계룡산을 취재 갔다가 동학사와 갑사를 취재하고, 동학사에서 등산로를 따라 3킬로미터 정도 올라가서 만난 심우정사(尋牛精寺) 목초(木樵) 스님을 인터뷰하고 다녀올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취재한 날부터 목초 스님과 의기가 투합된 박렬은 특이한 그의 이력에 매력을 느꼈다. 서울대 농대를 나와 서울에서 의사를 하다 39세에 입산한 그는 계룡산이 좋아 이곳에 심우정사라는 암자를 짓고 스님으로 수도하고 있었다.
왜 그가 입산했는지는 묻지 않았지만 짐작은 갔다. 절에서는 세 가지를 묻지 말라던가? 출가한 이유와 나이, 그리고 도통했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어떤 스님으로부터 귀동냥한 적이 있어 박렬은 질문을 삼갔다.
심우정사(尋牛精寺)?
계룡산에서 '소를 찾는 스님' 목초는 박렬과 친구처럼 돼 서로 도담(道談)을 나누고, 한반도와 인류의 미래에 관해 담론했다. 득도한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박렬을 만나면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통음(痛飮)하곤 했다.
계룡산은 <정감록(鄭鑑錄)> 외에 <도선비결(道詵秘訣)>, <삼한산림비결(三韓山林秘訣)>,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 등에서 한결같이 도읍지설을 주장했던 산이다.
풍수상으로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으뜸 명당이라고 일러온 신도안 골짜기는 지금 쓸쓸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한때 영산(靈山)이라 하여 2백여 종이 넘는 종교가 총 1만5천여 명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성세를 떨쳤던 곳 치고는 한적하기 그지없다.
신도안에 있던 종파의 특징은 산중에 있던 종파가 대개 산신을 섬겼고, 산기슭에 있던 종파는 대부분 단군을 모시고 있었으며,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앞으로 새 세상이 오되, 그 지도자는 반드시 종교인 가운데에서 나올 것이라고들 믿었다.
계룡산은 풍수상 회룡고조형(回龍顧朝形)의 길지로 알려져 있다. 회룡고조형은 말산(末山)이 조산(祖山)을 돌아다보는 형국이라는 말이다. 즉 꼬리가 원을 그리며 제 머리를 돌아다보는 역순의 형국으로, 이러한 산세는 한 바퀴 빙 둘러가니 힘이 약화되는 허약한 단점 또한 지니고 있는 터이다. 자신의 신세가 계룡산 같다고 생각한 데에는 그런 점 때문이었다. 지금 고개를 돌려 제 꼬리를 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박렬은 다시 금산사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며 도전이 기록하고 있는 그 어떤 말보다 그의 마지막 예언에 골몰했다. 몇 차례 떠올렸던 말이지만 지금처럼 가슴을 후벼판 적이 없었다.
"상말에 '이제 보니 수원 나그네라, 누구인지를 모르고 대하다가 다시 보니 낯이 익고 아는 사람이더라.' 그러니 너희들은 나의 얼굴을 잘 익혀 두어라. 진실로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내가 장차 열석 자로 오리라."
'열석 자로 오리라...'
그 말을 되뇌이자 박렬의 눈에 숫자만 보였다. 버스의 노선 번호, 차량번호, 간판에 쓰여진 전화 번호 등이 눈에 들어왔다.
'열석 자로 오리라, 열석 자, 열세 번째를 뜻하는 것일까?'
[더팩트 정치팀 ptoda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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