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형남·정진이기자] 한때 그는 케이블 방송에서 제품을 파는 실패한 ‘쇼호스트’였다. 정치평론가 이른바 ‘폴리캐스터(정치(politics)와 중계자(caster)를 합쳐 만들어진 신조어)’가 되기 전에는 아나운서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 수순으로 정치컨설팅업체 근무한 뒤 ‘쇼핑 호스트’까지 영역을 넓혔다. “광고영역은 방송과 직결된다”는 점을 의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푸 쓴잔만 들이켰다. 그러다 정치컨설팅 프리랜서로 활동했고, 정치권을 떠돌던 그는 방송작가 선배의 권유로 꿈꾸던 방송에 진출하게 됐다. ‘폴리캐스터’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최요한 시사평론가 얘기다.
현재 인터넷 방송을 통해 ‘노정렬-최요한의 개구쟁이’ 진행을 맡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최 평론가는 “2006년부터 폴리캐스터로 활동했지만, 정치컨설팅 이력까지 합치면 10년이 넘는다. 컨설팅에 몸담으면서 정치 분석 등을 했다”며 “폴리캐스터로서 팩트 전달은 뛰어날지 몰라도 팩트 분석력은 여전히 부족하다”라고 겸손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가 왜 ‘폴리캐스터’의 길을 선택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게 된다.

◆‘DJ 대통령 만들기 원조 멤버’인 아버지, “대학 입학 전부터 의식화 공부”
최 평론가는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의 얘기를 꺼내려면 아버지 얘기부터 해야 된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동교동계 비서를 시작으로 민주헌정연구회 전국운영위원장, 평화민주당 초대 총무국장까지 맡았으며, 국회 부의장 부서실장까지 역임한 뒤 정계 은퇴했다. ‘국민의 정부 탄생에 일조한 분이라고 강조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서는 수배․고문, 그리고 감옥을 다녀왔어요. 소위 김대중과 가까운 재야인사라고 해서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김대중 총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게 평생소원이었어요. 3당 합당 때도 지구당 위원장직까지 거절하셨으면 말을 다한 거죠.”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몸담았던 아버지 때문에 최 평론가는 남들보다는 빨리 사회에 눈을 떴다. 학창시절 아버지가 가지고 온 ‘불온 유인물’을 보며 의식화 공부를 했다. 대학 입학 땐 이미 각 운동진영의 운동 본부를 다 파악할 정도로 운동권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도 적극 찬성했다. 이 때문에 재미난 일화도 많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대학입학 당시 때의 일이다.
“대학을 입학 했을 때 아버지에게 ‘왜 대학에 들어가는 줄 아세요’라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어요. 이유를 묻는 아버지께, 저는 ‘노태우 정권을 물리치고 싶어서요’라고 답했죠. 그랬더니 제 손을 꽉 잡으면서 ‘그래! 우리 같이 물리치자’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더 웃긴 것은 이 얘기를 학교 선배들에게 자랑했다는 거죠. ‘나는 이런 아버지 뒀다’란 건데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잘 안하게 되는 자랑이잖아요. 사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이상 어쩔 수 없이 정치권에 몸담아야 할 ‘끼’가 숨겨진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성악가·아나운서 꿈꾸던 소년, “어머니 손맛 보는 계기 돼"
정치인 피가 흘렀던 최 평론가의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합창단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중학교 때 잠시 성악가의 꿈을 꿨다. 교회 성가대에서 봉사활동을 했을 당시 지휘자의 권유 때문이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최 평론가는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성악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등짝으로 날아오는 손바닥’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수배, 감시 등을 당하는데 그런 말이 나오느냐고 얘기하더군요. 저도 뒤늦게 그 말을 하고 후회했어요. 음악 공부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이를 알고는 단박에 ‘성악가’의 꿈을 접었어요. 성가대 활동으로 만족했던 거죠.(웃음)”
대신 또 다른 꿈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아나운서였다. 실제 공중파 방송 3사를 다 지원했지만 최 평론가는 가는 곳곳마다 낙방했다. 대학교 시절 학생운동 등에 열중하다보니 취업준비를 소홀히 했던 탓이다. “방송국 입사하려면 뭔가 따로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국방송광고학원에 다녔어요. 그곳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1등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나 아나운서의 길이 저의 길이 아니었는지 여기서 인생의 방향이 ‘확’ 바뀌었어요. 뜻하지 않게 정치컨설팅 회사에 추천을 받게 됐어요. 처음에는 ‘광고도 방송과 밀접하다’는 생각에 뜻을 가지고 열심히 했으나 아나운서 길과는 점점 멀어지는 느낌들었어요.”
최 평론가는 “끝을 보지도 못하고 방향이 전환되자 미련이 남았다”고 당시 심정을 말했다. 결국 홈쇼핑 ‘쇼호스트’로 들어가 김치냉장고를 팔며, 외도가 아닌 외도생활을 해야 했다. ‘쇼호스트’이긴 하지만 방송국 진출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제 적성과는 맞지 않다보니 잘하지도 그렇다고 오래 버티지도 못했어요. 결국엔 회의감만 느끼고 회사를 그만뒀어요. 아나운서가 된 이후 방송 등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봐야겠다는 의지는 김치냉장고 앞에서 꺽이고 말았던 거죠.(웃음)”

◆ 연이은 방송 실패…“정치평론가 되는 디딤돌 역할 해”
인생은 역전과 반전이 있듯 최 평론가도 역전과 반전을 거듭했다. 아나운서의 꿈을 완전히 접으면서 함께 포기했던 방송의 길은 그가 정치컨설턴트가 되자 자연스럽게 열렸다. 정치컨설팅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지난 2005년, 방송작가 선배가 시사평론가를 권유한 것. 그는 “내가 무슨 평론가냐”면서도 “기회가 있으면 한번 해 보겠다”고 스치듯 답을 던졌다.
“얼떨결에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기회가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담당자가 따로 있었는데 갑자기 출연을 못하는 바람에 ‘대타’로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비록 대타이긴 하지만 지금도 첫 방송 주제를 잊지 못해요. ‘중국의 입장에서 본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라는 주제였어요. 생방송으로 20분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이틀 밤을 꼬박 새워 준비했어요. 다행이 담당자들이 마음에 들어했고, 이때부터 ‘고정 코너’가 생겨나면서 시사평론가, 이른바 폴리캐스터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죠.”
입소문이 퍼진 탓일까. 다른 방송으로부터 섭외가 끊이지 않았다. 빡빡 스케줄은 아니었지만 쉬지 않고 꾸준히 방송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2006년도에 ‘노정렬의 뉴스야 놀자’에서 코너를 맡게 됐다. 지금은 ‘평론 파트너’라고도 부르는 노정렬과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방송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었지만, 더 큰 의미는 정렬이를 만났다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평론을 더 열심히 하고 더 재밌게 해주는 친구거든요. 그 때부터 인연이 이어져 지금은 같이 ‘노정렬-최요한의 개구쟁이’란 인터넷 방송을 지금까지 하고 있죠.”

◆ 언론탄압 한 MB정부 덕에 ‘개구쟁이’ 탄생? “그거 하나 고맙다!”
최 평론가에게 ‘개구쟁이’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개구쟁이’는 그가 개그맨 노정렬과 1년 넘게 만들어 가고 있는 시사풍자개그 인터넷 방송이다. 최 평론가에게 또 한 명의 자식처럼 여겨지는 ‘개구쟁이’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던 걸까. “MB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저희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하나씩 없어지기 시작하더군요. 처음에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전부 다 없어지고 나니 억울함 등등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민중의 소리에 ‘노정렬과 함께 시사 개그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죠. 예전부터 같이 프로그램을 하나 맡았으면 좋겠다고 오래전부터 이미 얘기했고, 정렬이도 방송이 없어지는 추세여서 지체 없이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죠. 이른바 언론탄압(?)이 시작됐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면에서는 MB정부에 고맙기도 해요. 개구쟁이 방송이 인기를 끄는 비결이니까요.(웃음)”
그는 첫 방송 비화도 거침없이 밝혔다. ‘1회분’ 없이 ‘2회분’부터 나갔다. 지금과는 달리 앉아 있는 것 자체도 어색해 자체적으로 걸러냈기 때문이란다. 그는 첫 방송이 나가고 너무 창피했지만 오기가 생겨서 계속 밀어붙이게 됐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방송이 많이 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긴장돼요. 특히 원고를 쓸 때면 더더욱 그래요. 팩트 확인에 대한 부담감이 극에 달했거든요. 정렬이요? 걔는 천재예요. 성대모사 뿐 아니라 모든 게 다 머릿속에 정리돼 있어요. 방송 할 때도 20분 전에 원고 한 번 훑어보고 바로 술술 풀어내니까요. 여하튼 저는 그런 정렬이를 볼 때마다 ‘얘한테 묻어가야 겠다’고 다짐했었죠.(웃음)”

◆ '개구쟁이' 40년 더!…“언론 자유의 선봉에 서길”
일전에 최 평론가를 만났을 때 그는 “여든 살까지 개구쟁이 방송하겠다”고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문득 그 말 속에 숨은 뜻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자 그는 대뜸 ‘개구쟁이’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에 나왔던 말을 꺼냈다. ‘누군가 조국에 관한 길을 묻거든 개구쟁이를 보라.’ 최 평론가는 그 어떤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일제 치하에 독립 운동을 하는 투사와도 같은 모습이다.
“노정렬-최요한의 개구쟁이'가 기존 언론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과감하게 한다고 믿고 있어요. 그리고 진실을 추구한다는 바탕하에 이 방송이 언론 자유를 선도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간에 언론 자유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언론을 만드는데 한 축을 담당하고 싶어요. 개구쟁이 방송의 역할이기도 하고요.”
인터뷰를 마치기 전에 그에게 가족 이야기를 꺼내봤다. 정치평론가라는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그가 부모님께는 어떤 아들로, 아내에게는 어떤 남편으로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어떤 아버지로 남고 싶은지 물었다. “아버지는 ‘개구쟁이’의 열혈 시청자예요. 어머니도 마찬가지예요. 아버지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께는 ‘개구쟁이’를 잘 진행하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어요. 저는 그게 효도라고 생각하니까요. 아내는 저의 제일 큰 지지자예요. 실제로 모니터링도 하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거든요. 지금도 항상 ‘당신이 제일 하고 싶어 하는 것. 잘하는 것에 만족한다’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이 끝까지 나오도록 해야겠죠. 아이들은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가서 개구쟁이를 봐도 잘 이해를 못해요. 하지만 욕심을 좀 부려본다면 나중에 애들이 커서 ‘민주주의 질서가 역행하던 그 반동의 시기에 아빠가 열굴 내밀고 이름을 내세워서 바른 소리했다’는 말을 듣고 싶네요.”
<사진=김용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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