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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고교 제적생' 안희정 최고위원 "민주당이 충청 마음 얻도록 선두에 설 것"

[장 민 박형남기자]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다."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 (www.ahnhj.kr/main/20090523_index.php)을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답변이다. 험한 정치판에서 '적'이 별로 없고, 늘 손해 보는 이미지가 강하다. 소신은 뚜렷하지만, 남을 밀어 붙이기보다 포용하고 안고 가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최근 민주당과 친노그룹 간에 교통정리와 역할 조정도 그의 몫이다. 두 세력이 험한 감정싸움 없이 자기 나름의 영역을 존중하고 정치적 진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안 최고위원의 역할이 컸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생전에 안 최고위원의 고민을 염두에 두고 "고생이 많다"고 격려했다.

그러나 안 위원이 지지자들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오면 평가가 극명으로 갈린다. 비자금 관리로 옥살이를 한 탓에 '음모'적이고 공격적으로 보는데다 '골수 운동권'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 궂은일을 많이 했고 보수층의 '집중 공격'을 받아온 그에게 덧씌워진 강성 이미지는 그의 '홀로서기'에 적지 않은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불법자금 받아서 죄짓고 감옥 갔다 온 사람이라는 것 외에 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며 " 386의 젊은 측근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공격당했지만, 감내하고 이겨내야 할 부분으로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고교 중퇴’와 세번의 ‘감옥살이’로 나이에 비해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아온 안 최고위원은 “자식 노릇,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한 번 못해 미안하다”며 “전문 옥바라지 꾼이 다된 부인이 이해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참여정부 시절 ‘우-희정’(우의정+안희정)으로 불렸던 안 최고위원을 29일 여의도 금산빌딩 '더 좋은 민주주의 연구소'에서 만났다.

혁명의 길 선택 ‘고등학생 안희정’…“고1때부터 지하서클 활동”

“초·중학교 때는 평범했어요. 그러나 고등학교는 6개월만 다녔습니다. 중 3학년 때부터 소위 말하는 사회과학 서적.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등을 봤어요. 일찌감치 민주화·제국주의·식민지 역사를 알게 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독재시대가 끝났다’고 얘기한 것을 보고 ‘박 대통령은 독재자였구나!’는 생각을 하게 됐죠. 5·18,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이 신군부에 의해 조작되는 것을 보고 ‘혁명가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공부보다 민중 혁명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안 최고위원은 생각이 아닌 실천의 길로 들어섰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때 교과서를 헌책방에 팔아버리는 '퍼포먼스'와 함께 정규 교육을 접었다. 사회과학 서적만을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본격적인 혁명가 인생을 시작했다. 노동 야학 선생을 하던 네 살 위의 누나가 혁명가와 함께한 동지였다. 안 최고위원은 그날부터 역산해 올해로 사회운동가 생활 40년을 헤아린다.

“대전에 위치한 한 서점에서 우연히 지하운동가를 알았어요. 그 덕분에 충남대 복학생 및 지하그룹 선배들을 알게 되면서 교류했으니까요. 그 선배들이 체포되면서 제 편지와 문건이 발견돼 저도 연행 됐어요. 형사들은 제 책상서랍을 뒤져 서적, 일기장을 가지고 가더니 다음날 학교 교장실 앞에 와 있더군요. 물론 저는 고등학생이라 훈방조치를 받았지만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죠. 그때 연애 중이었는데, 연애편지도 다 뺏겼어요.(웃음)”

제적당한 후 학교를 다닐 생각이 없었던 안 최고위원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3개월 동안 서울 성남고를 잠시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안 최고위원의 의지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어른들한테 대항을 했던 기억이 나요. 그 당시 ‘아직 어리니까 더 많이 배워서 나중에 인생을 결정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4·19혁명 당시 초등학생들도 플랜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지 않았느냐’, ‘일제시대 때 초등학생들도 독립운동을 했다’고 반박했어요. 나이, 돈, 사회적 지위로 저를 누르는 걸 끔찍히 싫어했어요. 인간적 논리로서 설득하면 동의하겠지만….”

무모한 도전이 부른 ‘실패’…“한때 빨갱이로 내몰릴 뻔”

혁명의 꿈을 안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안 최고위원은 혁명에 대한 남다른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고교 중퇴의 청소년이 활동할만한 무대가 거의 없었다. 지하서클을 만들어 국민을 위해 나라와 정권을 잡겠다는 일념은 그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감정을 통해 호소했는데도 불구하고 ‘빨갱이’로 내몰리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가중됐다. 결국 그는 큰 결단을 하게 된다. 지하서클 활동을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내린 결정이었다. 순전히 혁명을 위해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조직을 규합해야만 사회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갈 결심을 했고, 운 좋게 고려대에 붙었던 거죠. 그런데 저는 합격자 발표가 나기도 전에 고려대 지하서클에 들어갔어요. 재수할 생각이 없었고, 학생운동 경험만 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죠. 심지어 가짜로라도 학생증을 구해 서클활동하면 그만이라는 생각까지 했는걸요.”

대학에 입학한 안 최고위원은 공개된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 수 없어, 지하서클 생활만 계속했다. 중학시절 사회과학 서적을 독파한 안 최고위원은 고대 운동권의 이론가이자 뛰어난 전략가였다. 불행히도 안 위원의 가세가 몰락하면서 명실상부한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 1984년 안 위원 집안은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하면서 파산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버지 양말에 꼬깃꼬깃 넣어둔 29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신림동 산동네에서 연탄아궁이 하나 있는 단칸방을 얻어 일곱 식구가 그곳에서 생활했다. 대학 다니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악화됐다.

" 방학 때마다 서클 친구들과 공사판을 나갔죠. 공사판 잡부로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내 등록금 벌어 놓고 혁명운동을 해야 하니 정신없이 바빴죠.(웃음).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일 하면 일당이 5만원이었는데, 반대로 저녁부터 아침까지 일하면 7~8만원을 줘요. 그래서 야간에만 작업했죠. 시청 앞부터 덕수궁 돌담길 앞 케이블 매설공사 주역이 접니다. 그때는 한 학기 등록금이 70만원을 웃돌았는데, 한 열흘 일하면 등록금을 벌었죠.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대학교 등록금은 보통 오른 게 아니에요. 학자금 대출해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데…."

대학교 4학년 때 이념적 논쟁이 벌어지면서 지하서클이 분열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적 단위에서 통일된 총학생 체제, 이른바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출범했다. 이인영 전 의원을 전대협 1기 회장으로 선출하고 '전투 대열'을 정리하는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87~88년에 저를 포함한 전대협 멤버들이 연거푸 구속됐고 이후 노태우 대통령 특사로 나왔어요. 이 때 혁명이라는 방식은 안되겠구나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87년 6·10 항쟁이 만들어 놓은 정당정치 공간에서 국가운영에 대한 공부를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먹고 살길도 찾아야 했고…”

혁명의 연장선상, 정치로 ‘턴’…반복된 실패는 여전

안 최고위원은 김영춘 전 의원의 소개로 김덕룡 의원 비서관으로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딛었다. 바로 옆방이 초선의원인 노무현 의원 사무실이었다. 학생운동 인연이 있는 이광재 보좌관과 배가 맞았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시국문제를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다.

“이광재 의원은 연세대 학생운동을 했고, 저는 고려대 학생운동을 해 서로 알게 됐어요. 노 전 대통령과도 친해져 종종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특히 1990년 1월 3당 합당시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7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라가지 않고 꼬마 민주당을 결성했어요. 저는 꼬마민주당을 따라가지 않은 보좌진 18명 중의 한명이었죠. 그리고 이철 전 의원 비서로도 활동했어요.”

혁명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안 최고위원은 혁명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정치권에서 사회를 바꾸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정치를 포기했다고 한다. “돈 버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으로 인생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죠. 그때 정치권을 나와 주변 지인분과 함께 출판사를 해서 돈을 벌었고, 마지막 남은 학교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 복학했어요. 그때 역사, 철학, 사회변혁에 대한 생각 등을 다시 정리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가치 정립은 큰 깨달음이었다. "진보주의자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인간은 다 별수 없는 존재다, 인생 별것 없다고 생각하면 보수주의자가 됩니다. 사람은 모두 부족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좀 더 나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믿으면 진보주의자입니다. 결국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와 역사에 대한 믿음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것 같더군요."

가장 보람 있었던 일도 이때다. 노 전 대통령의 ‘여보! 나를 도와줘’라는 책을 출간해 영업 상무로 책을 팔고,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에 있는 모든 책방을 다녔다. 당시 안 최고위원은 지방 출장을 통해 전국을 한 바퀴 돌면 감기가 걸려서 돌아올 정도였다.

“매달 20일이면 지방 수금을 나갔죠. 서울부터 천안을 거쳐 대전에 도착하면 호남선부터 돌까, 경부선부터 돌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이런 생활을 1년 6개월 동안 생활하다 노 전 대통령이 지방자치연구소를 만들 때 함께 하자는 제안이 와서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생활을 했고, 여기까지 왔네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무대 위의 노무현만 있었다”

안 최고위원이 들려준 후일담 하나. 안 최고위원은 노 전 대통령과 많은 여행을 다녀보지 못했다고 한다. 시간이 되면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여행을 다녀보고 싶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추억 만들기’가 영원한 미제로 남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토로했다. “대통령 순방길에 ‘전용기’ 한 번 타보지 못했어요. 대선 후보가 되고 나서부터 ‘나의 노무현’은 없고, '무대의 노무현'만 있었던 거예요. 그 전까지 단출한 식구의 스태프로서 사랑받았지만 그 후론 없었죠.(한숨)”

노 전 대통령의 서거 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 자신의 전과 전력을 애기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를 비롯해 문재인 전 비서실장 등과 함께 김 전 대통령을 만났다. 안 최고위원은 “김 전 대통령에게 ‘고등학교 때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의문을 품고 충남대 예비역 선배들과 지하 서클 만들어 활동하다가 제적을 당했었습니다’라고 말을 했더니 깜짝 놀라시더군요. 대번에 김 전 대통령은 저에게 ‘고생 많으셨어요. 안 동지’라고 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안 최고위원은 '반DJ' 성향 인사들도 적지 않은 '친노진영'에서 대표적인 '친DJ'로 통한다. 그런 정치성향 때문에 안 최고위원의 경우 당에서 입지가 만만치 않다. 안 최고위원은 95년 노 전 대통령 부산시장 출마를 계기로 동교동에 노 전 대통령을 대신해 심부름을 많이 가는 등 김 전 대통령과도 인연도 깊다.

‘조직가 안희정’의 조직관…“희생과 옳고 그름 분명하는 스타일”

안 최고의원은 고려대에서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됐을 정도로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가담한 탓인지 조직 운영 실무에 밝다. 이런 까닭에 안 최고위원은 '개인'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체질이 몸에 배어 있다. ‘자신의 것을 과감히 버릴 줄 안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다. 그만의 조직관은 무엇일까.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 이유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이른바 영장류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조직생활을 하는 거죠. 사이좋게 협력하고, 인류·국가·정당·지역사회라는 이름으로 잘 지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보면 사회적 행위, 사회활동의 모든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죠. 제 것을 양보하고 전체 이익을 위해 노력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직적, 조직가로 자질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18대 공천에서 안 최고위원은 논산-계룡-금산에서 입후보하려 했으나 대선 자금 문제로 구속된 전력을 이유로 민주당의 공천 심사에서 탈락했다. 할 수 없이 출마를 포기해야만 했다. 출마를 결심하고 조직, 선거 전략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그는 한숨도 못자고 고민한 끝에 과감히 출마를 포기하고 당의 결정에 따랐다. 당시 그의 결정은 '정치인 안희정'의 자산으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반발하는 게 맞아요. 헌법이 보장한 피선거권이 주어졌는데 이를 쉽게 박탈할 수 있느냐고 저항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피선거권이 박탈되었다고 동정을 받기보다 과감히 접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이왕 접는 것 확실하게 접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죠.”

안희정의 고민은?…“진보진영 힘 합쳐야 되는데~'"

안 최고위원은 참여정부 출범의 주역이었지만 정작 참여정부에서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물밑에서 '안희정'이란 이름만 회자됐을 뿐 양지에서 그의 이름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 탓인지 노 전 대통령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안희정' 이름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실제로 안 위원이 자기이름을 걸고 정치에 나선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 2007년 최고위원 당선은 그에게 새로운 정치적 성장의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원외이지만, 정세균 대표를 비롯한 당 수뇌부의 신임도 각별하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친노세력'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사로 대두된 상황에서 그의 역할과 비중은 더욱 커지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뒤 진보진영을 어떻게 힘을 합쳐야 할지 가장 고민이에요. 민주주의 10년 동안 서로가 서로 때문에 받았다는 상처, 미움, 실망 등이 엉켜 있습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로 한 꺼풀 약화됐지만 살 섞으면서 살기 싫다는 생각이 여전히 팽배해 있어요. 이걸 어떻게 극복하고 힘을 모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친노 신당 창당은 민주당의 잘못!…“맏형 노릇 제대로 못했다”

안 최고위원은 친노신당 창당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진보진영 내에서 덩치와 역사를 보면 민주당이 맏형입니다. 맏형이 맏형 노릇을 못했기 때문에 친노 신당이 생긴거죠. 동생들이 못살겠다며 분가하겠다고 해서 동생 뺨을 때릴 수는 없잖아요. 민주당이 먼저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접근해야 진보진영에 미래가 있고 민주당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싸우면 민주당에 부끄러운 일이고, 맏형으로 반성하고 변화를 추구해야 됩니다.”

‘충청도 지킴이’ 선언한 이유…“영호남 정서 깰 수 있는 곳”

안 최고위원은 한때 안산 전략 공천설이 나돌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충청도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논산 출신으로,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만큼 충청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다르다. 전국정당화를 추진 중인 민주당 입장에서도 충청지역의 지지율 상승은 중요 현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안 최고위원에 대한 충청인들의 지지는 기대에 못 미친다. 각종 여론조사에도 안 최고위원의 이름은 잘 나오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충청도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꽤 높습니다. 다만 정당지지율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정치세력과 인물이 없기 때문이죠. 산에 밤이 많이 떨어지면 누군가 담아야 되는데 그걸 담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을 담지 못해 지역정당 틀처럼 보이는 거죠. 충청도는 진보, 보수의 가치를 가지고 진검승부를 낼 수 있는 중요한 곳입니다. 충청도만이 영·호남 지역 정당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충청도에서 정치를 계속 할 것이고, 충청도 지역 분들의 더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도록 노력할 거예요. 지금도 과분한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안 최고위원은 노무현 재단 사업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민주주의 역사에 노 전 대통령의 가치를 기록, 기념하고 더 좋은 사회를 향한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만들어야겠다는 이유에서다.

정치적 목표는 “진보세력 결집과 대통합”

"김용옥 교수가 얘기했듯이 노 전 대통령은 '임금이 아닌 첫 번째 대통령'이었습니다. 헌정사에서 봉건적이고 법을 뛰어 넘어선다고 믿어온 대통령에게 그러한 권한이 없다는 것을 노 전 대통령은 증명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공화국의 출발입니다. 그것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야 권리와 의무로 짜여진 사회가 가능합니다. 민주주의의 출발과 귀결점으로서 노 전 대통령의 일생을 주목하고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정표를 확실히 세워야만 역사가 후퇴하지 않습니다. 저도 열정을 쏟으려 합니다."

이 때문에 안 최고위원은 진보세력 통합을 위해 고민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노무현 재단은 대통령의 유지를 기록하고, 봉하 사업을 꾸려가는 역할을 맡고 있죠. 이에 반해 시민주권모임은 진보세력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 깨어있는 시민들이 결집해 진보진영의 큰 활력소가 될 수 있도록 노력 중에 있어요.”

마지막으로 안 최고위원이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안 최고위원은 즉답을 내 놓는다. “대한민국 진보세력의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야권 대통합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야권만 통합한다고 촛불시민이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미국에 민주당, 영국에 노동당과 같이 우리도 진보진영이 모두 뭉친 대표 세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한 통합구조의 질서를 만들어보고 싶은 게 저의 큰 목표 같네요.”

<사진=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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