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바뀐 공약, 문구까지 그대로
"평가 없으니 반복" 무소속 후보들의 진단

4년마다 똑같은 약속이 돌아온다. 재탕, 삼탕, 심지어 사탕. 어차피 찍을 당이 정해진 곳에서 공약은 더이상 당선의 조건이 아니었다. 유권자를 설득하는 '도구'여야 할 공약(公約, 실행할 것을 약속)은 공약(空約, 헛된 약속)이 된 지 오래다. 지역 현안은 달라졌는데도 공약은 이름만 바꾼 채 반복되고, 이행 여부를 따져 묻는 과정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더팩트>는 6·3 지방선거 후 전남·대구·경북 광역의원 후보 공약을 전수 분석하고, 수천 장의 공보물을 뒤졌다. 지역 유권자와 전문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 기록을 5편의 기획 '돌돌공-돌고 도는 공약'에 고스란히 담았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전남=서다빈·이하린 기자] "(무소속) 한순철이 공약은 제일 좋았제. 근디 내가 찍어봤자 안 될 거 뻔한디, 그래서 민주당 찍었어야."
지난달 24일 <더팩트>가 찾은 전남 보성군 벌교 5일장. 장날을 맞은 시장은 과일을 흥정하는 손님과 상인들의 호객 소리로 북적였다. 시장 골목을 천천히 걷던 김모(64·여) 씨는 이번 지방선거 광역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한순철 후보의 이름이 나오자 피식 웃었다.
선거 때마다 집으로 배달되는 공보물을 하나하나 읽어보는 것이 취미라는 그는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후보들의 공약을 모두 살펴봤다고 했다. 가장 마음에 든 것은 한 후보의 공약이었다.
AI(인공지능)를 활용한 벌교 꼬막·보성 수산물 공동브랜드 육성과 온라인 라이브커머스 지원, 관광객 체류형 소비코스 개발 등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공약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표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김 씨는 "힘을 실으려고 해도 내 표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애서 그래서 민주당을 찍었제"라고 멋쩍게 웃었다.

시장을 벗어나도 비슷한 이야기는 계속됐다. 주민들이 가장 많이 꺼낸 이야기는 '공약이 또 그 공약'이라는 것이었다. 벌교역 인근에서 만난 김모(68·남) 씨는 "나중에 봐보랑께. 우리 벌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참말로 다음부터는 같은 지역에서 같은 공약 안 나오게 뭐라도 해야 쓰겄다"고 토로했다.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하는 서모(69·여) 씨는 공약이 서로 비슷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민주당을 좀 밀어주는 편이여. 군수가 일을 잘허니께 민주당을 찍었제"라고 말했다.
공보물을 꼼꼼히 보고 투표했다는 강모(55·여) 씨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는 "선거 때마다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 같아 솔찬히 아쉽제. 지역 사정이 비슷허니 공약이 쪼메 겹칠 수는 있다고 쳐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고대로 들고나오는 건 우리를 놀리는 것 같잖어"라며 "같은 공약을 또 낼 거면 그 공약이 얼마나 (이행)됐는지 왜 또 내놓는 건지라도 공보물에 적어 줘야 하지 않겠능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의 생각은 실제 분석 결과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더팩트>가 이번 6·3 지방선거 전남 광역의원 후보 공보물을 2022년 지방선거 공보물과 전수 비교한 뒤, 생성형 AI 챗GPT를 활용해 공약 유사도를 분석한 결과 전남 광역의원 후보 공약의 평균 유사도는 78.7%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순천·신안·함평이 각각 83%로 가장 높은 유사도를 보였다. 이어 여수·영광·완도·장흥·진도·해남·나주·담양·목포·보성이 각각 78%, 곡성 75%, 장성 73% 순이었다. 반면 광양(70%)과 강진(65%)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공약 비중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곡성에서는 재선에 성공한 진호건 민주당 도의원이 2022년 제시했던 △어르신 공공일자리사업 확대 △영농비용 절감 △여성농업인 농촌생활환경 개선 등의 공약을 이번 선거에서도 문구까지 거의 그대로 담은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 같은 공약 반복 현상을 유권자들이 직접 확인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농번기인 6월에 치러지는 지방선거 특성상 농사일에 바쁜 고령층 유권자들이 수십 쪽 분량의 공보물을 모두 읽고, 4년 전 공약과 비교·검증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지난달 25일 곡성 옥과면에서 숙박업을 하는 김모(60대·남) 씨는 "진 당선인이 4년 전(2022년)에 냈던 공약도 다 안 지켜졌는디, 이번에도 똑같은 공약을 그대로 들고나왔제. 공약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계속 살펴봐야 하는디, 그게 안 되니 군수고 도의원이고 죄다 똑같단 말이여"라고 비판했다.

곡성 터미널에서 만난 60대 유권자는 "농촌에서 일하기도 바쁜디 언제 그 사람들을 다 알아보겄어"라며 "시장, 광역의원부터 기초의원까지 종이가 7장 넘게 날아오는데 머리가 아파서 기억도 모대. 노인들은 아예 맨 위에 있는 맨 첫 줄에 있는 기호 1번만 보고 찍는 경우가 허다혀"라고 말했다.
광주행 버스를 기다리던 이모(50대·여) 씨는 "(4년 전) 공보물을 내가 어떻게 다 기억하겄소"라며 웃어 보였다. 이어 그는 "우리 동네는 민주당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있으니 공약도 신경을 덜 쓰는 것 같어 많이 씁쓸혀"라며 "당에서 경선할 때도 똑같은 공약을 내면 감점을 하든가, 똑같은 공약을 쓰더라도 이게 몇 퍼센트 이행이 됐고 왜 다시 쓰는지 이유를 적게 해야제"라고 꼬집었다.

4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약을 내놓은 후보가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본 무소속 후보들의 허탈감도 적지 않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와 맞붙었던 익명을 요청한 한 무소속 후보는 선거를 치른 뒤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졌다고 털어놨다.
그는 지역 상권 회복과 청년 정착을 위한 공약을 준비하기 위해 지역 선후배들과 수차례 머리를 맞대 기존 후보들과 차별화된 공약을 준비했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고 했다.
그는 선거가 끝난 뒤 공약의 내용보다 정당 간판이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현실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약을 아무리 꼼꼼히 준비혀도 결국은 정당 벽을 넘기가 쉽지 않더랑께.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당 힘이 워낙 셌어. 정책 경쟁보다 정당 간판이 선거를 좌우하는 현실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꼈제"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좋은 공약만 낸다고 되는 게 아니여. 공약이 얼마나 지켜졌는지 제대로 평가하고 검증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혀. 그런 게 없으니께 똑같은 약속만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거제"라고 강조했다.

곡성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신현주 후보는 지방선거 공약이 반복되는 원인으로 농촌 지역의 고령화와 정당 중심의 정치 문화를 꼽았다. 신 후보는 통화에서 "지역 내 유권자층이 고령화되다 보니 후보들이 굳이 철저하게 정책을 준비하지 않아도 당선되는 구조"라며 "70~80세 되신 어르신들은 (공보물) 우편물을 받더라도 지난 선거와 공보를 비교하긴 어렵고, 정치인에게 기대하는 수준이 낮아 안보고 쓰레기통에 넣는다고 하더라. 참 아쉬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신 후보는 곡성 죽곡면 남양리 이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소멸과 인구 감소, 침체된 지역경제를 직접 겪은 경험을 공약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같은 공약을 위치만 바꾸고 반복하는 것은 결국 유권자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라며 "공약을 다시 내놓는다면 이전 공약이 얼마나 이행됐고, 왜 다시 추진하는지 실현 방안까지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공약 반복을 막기 위해 주민 공청회를 열어야 한다. 이행 점검 TF를 만든다 한들 결국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며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진보당, 정의당, 국민의힘, 무소속 등 다양한 후보가 나와 서로를 (정책) 견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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