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필수의약품 지정에도…제도권 진입 못 해
출처 불명 약물 구매·항암제 복용까지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지 6년.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높은 장벽 앞에 서 있다. 이재명 정부가 '임신중지약 도입'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며 변화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졌지만, 그 기대는 번번이 정치권의 침묵에 가로막혔다. 정치권은 여전히 낙태 이슈를 '민감한 표심'으로만 바라보며 책임 있는 논의를 회피하고 있다. <더팩트>는 법과 제도 밖에서 임신중지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목소리, 그리고 입법을 추진하려는 이들의 문제의식을 통해, 이 입법 공백이 만들어낸 현실의 무게를 총 3회에 걸쳐 기록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더팩트ㅣ서다빈·김수민 기자] 헌법재판소가 2019년 4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6년이 훌쩍 지난 지금, 국회는 여전히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 없이 후속 입법을 방치하고 있다. 그 공백의 대가는 온전히 임신 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유산유도제(임신중지약) 불법 거래는 해마다 늘고 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올해 8월까지 적발된 임신 중지 의약품 불법 판매 건수는 2641건에 달했다. 연도별로 보면 △2021년 414건 △2022년 643건 △2023년 491건 △2024년 741건 △2025년(1~9월) 352건이다. 이는 적발된 건수만을 집계한 수치로, 실제 유통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임신 중절 수술 자체가 두렵거나 수술 비용에 대한 기준 없이 '부르는 게 값'인 비용이 부담되는 여성들은 임신중지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임신 중지 의약품 미프진(미프지미소정) 거래 경험이 있는 A씨는 <더팩트>에 "텔레그램을 통해 약을 구매했다"며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나 원치 않은 임신에 대비하려고, 유통기한이 지날 때마다 약을 추가로 사두곤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미프진을 구매했던 B씨도 "약 구매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혼자 병원에 가서 수술받는 건 사회 분위기상 두려웠다"라며 "이미 세계보건기구(WHO)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약물을 우리나라 여성들은 업자에게 진짜일지, 가짜일지도 모르는 약을 웃돈까지 주고 사야 한다"고 했다.

낙태죄가 비범죄화된 이후에도 여성들이 여전히 위험한 선택에 노출된 현실은 후속 입법 책임이 있는 국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앞서 21대 국회에서 다수의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모두 폐기됐다. 당시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던 한 전직 의원은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심의 안건을 결정하는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이 법안을 논의할 의지가 부족했던 것이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 여성 건강권이 무법지대에 방치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종교계의 반발, 보수적 유권자 의식, 사회적 합의 부족 등 논의가 지연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임신 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은 병원에 가서 안전하게 수술을 받기도 어렵고, 텔레그램 등 익명 채널을 통해 출처가 검증되지 않은 임신중지약을 구매하는 등 어려운 선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독성이 강하고 부작용이 큰 항암제를 임신중지 약물의 대체제로 쓰는 사례도 적지 않다.
현장에서는 정부와 국회 모두 여성 건강권을 방치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 WHO는 이미 2005년 임신중지약인 미프진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다. 현재 미국, 프랑스 등 90여 개국에서 임신중지약을 판매한다. 약국 등에서 구매할 수 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쉐어(SHARE) 나영 대표는 통화에서 "의원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보건복지부가 먼저 책임지고 도입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심각한 책임 회피"라고 비판했다.
국내에서도 여러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보건복지부 장관과 식약처장에게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을 권고한 바 있다. 제약업계 역시 임신중지약의 제도권 편입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한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통화에서 "필요한 여성들이 분명히 있다. 여전히 불법 경로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전문가의 관리 아래 안전하고 적법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 이메일: jebo@tf.co.kr
-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