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LA=황덕준 재미 언론인] 현지시간 8월 25일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당초 예정된 30분을 훌쩍 넘어 1시간여 동안 이어졌다. 시작은 비극이었다. 되살리고 싶지도 않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회담 시작 두어시간 전 소셜미디어에 돌발적인 문자를 올렸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숙청과 혁명처럼 보인다…그런 곳에선 사업을 할 수 없다…"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전혀 맞지 않는 직설적 비난이고 원초적인 욕설과 다름없었다. 한국 대통령실의 일부 관계자는 회담이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가졌다는 후문이다. 알려지기로는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수지 와일스 백악관 비서실장을 만나 우려되는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등 참모들의 적극적인 막후 '불끄기' 노력이 효과를 봤다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백악관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간 트럼프의 첫 마디는 "잘 생긴 분이네. 아주 좋아요"였다. 이때부터 초긴장 상태였던 상황은 극적인 반전 모드로 바뀌었다. 이 대통령이 방명록에 서명하기 직전 트럼프는 의자를 빼주고 서명하던 펜에 관심을 보여 즉석에서 선물로 받는 장면이 이어졌다.
두 정상간의 관계가 2시간여 만에 친화과정으로 급물살을 타더니 결국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됐다. 트럼프가 "나의 오해(Misunderstanding)였다"라고 에두르지 않은 표현을 내놓을 정도로 이재명 대통령의 국내 상황에 대한 설명은 명료했다. 게다가 "(트럼트) 대통령께서 '피스메이커'를 하시면 저는 '페이스메이커'로 지원하겠다"는 발언은 회담 전반을 유연한 분위기로 바꾼 백미였다.
미국인들이 라임(운율)이 맞는 화법을 좋아하는 걸 알았는지 이 대통령은 일종의 '아재개그'로 트럼프의 닫힌 마음을 '무장해제'시켜버렸다. 단언컨대 '올해의 한마디'로 꼽히기에 모자람이 없다. 트럼프가 북한 문제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싶어한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김정은 북한국무위원장과 "매우 친하다"며 늘 '브로맨스'를 자랑해온 그의 과시적 심리와 북한문제에 관해 '게임 체인저'가 돼 궁극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간파한 '신의 한수'였다. 트럼프는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할 것이냐'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그러길 바란다"라며 "나는 회의에서 잠시 빠져나와 여러분 대통령이 원하면 그를 위해 뭔가를 해줄 수도 있다"고 답했다.
더 나아가 "이 대통령과 김정은의 만남을 주선할 수 있다"라며 "나는 김정은과 사이가 좋고, 무엇이든 내가 한국과 관련해 사람들을 모으도록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함께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피스메이커가 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회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면서 방위비 분담금 인상, 무역 불균형 해소 등 당초 예상된 주요 쟁점사안은 밀려났다. 대신 트럼프가 언급한 '미국 조선업의 현재와 미래'와 관련해 한미간의 조선업 협력이 중심화제가 됐다.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참석한 미국의 씽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초청 강연과 간담회에서 어떤 조언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인내하라는 것"이라고 답해 주목을 받았다.
트럼프가 돌발적이고 도전적인 압박을 가할 때도 참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회담에 임했다는 뜻이다. '인내'는 이른바 '젤렌스키 모먼트'로 불리는 최악의 치욕적 상황을 차단하는 핵심 키워드였던 것이다. 우크라니아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3월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설전을 벌인 상황까지 예상하며 세세하게 챙긴 이 대통령의 준비성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북한에 트럼프 타워를 세우고, 골프를 같이 하는 건 어떻겠냐"라는 농담까지 던져 트럼프의 귀를 즐겁게 만든 원천은 '인내'였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국익 우선의 실용외교'를 외쳐온 이 대통령의 원칙과 맞닿아 있다. 5천만 국민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미국의 파워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에서 자존심을 누르되 자부심은 잃지 않는 지난한 균형을 최대한 지켜냈다고 본다.
트럼프와 회담하는 동안 의자에 깊숙이 앉지 않은 이 대통령의 자세를 지켜보며 어떤 사람은 "안쓰러웠다"고도 했다. 집안살림을 책임 진 소년가장이 부잣집에 찾아간 듯하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인내'라는 낱말의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되는 촌평이다.
취임 3개월을 갓 지낸 이 대통령에게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통과의례' 그 이상이다. 내란 후유증을 추스리는 국내 정치상황을 사실관계 중심으로 설명하고, 대외적으로 실용 외교의 토대를 구축한 기회였다. 트럼프 대통령과 "서로에 대한 호감과 신뢰를 쌓는 시간이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트럼프 특유의 '퍼스널 디플로머시'에 맞춰 이재명 대통령 나름의 개인적 매력을 어필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회담에서 논의된 내용들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지가 관건이다. 특히 북한 문제에서 한국이 정말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실제로는 '들러리'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북한 문제든 경제 협력이든, 결국 게임의 룰은 미국이 정하고 한국은 따라가는 구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개월 가량 남은 APEC에 이르기까지 국제정세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지만 실제로 트럼프가 참석하고 이 대통령에게 말한 대로 김정은과 만나는 일이 추진된다면 세계의 이목은 다시 한반도에 쏠릴 것이다.
10월의 경주 APEC은 한결 더 막중해졌다. 역사에 남을 이벤트가 될 것인가, 그저 그런 국제회의로 끝나게 될 것인가.

djktown@naver.com
-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 이메일: jebo@tf.co.kr
-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