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직원, 업무차 베트남 출국
미국으로 떠난 뒤 가발 도매 사업 시작
핀란드 北 대사관으로 도주해 망명 신청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절도죄 복역 후 대기업 취직, 결혼 후 업무차 베트남 출국,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두 차례 위장 결혼, 핀란드로 향하던 중 무효 여권 소지로 체포, 북한 대사관으로 도주.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중정)도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한국인 A의 행적이다. 그는 북한 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 뒤 열차에 몸을 싣고 홀연히 사라졌다. A는 누구였을까.
1976년 12월 2일 중정은 한국인 A가 핀란드 헬싱키 주재 북한 대사관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중정은 외교부에 A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그가 북한 대사관으로 가게 된 경위와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치 여부를 함께 파악하라고 주문했다.
중정이 사전에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A는 1962년 절도죄 복역 후 1964년 국내 모 대기업 건설사에 취직했다. A는 배우자와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있었고 1968년 회사 업무차 베트남으로 출국했다. A는 8년 후인 1976년 11월 23일 핀란드에 입국을 시도했지만, 무효 여권 소지를 이유로 현지에서 조사를 받게 됐다. 하지만 A는 24일 새벽 3시 행방을 감췄고, 30일 핀란드 헬싱키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발견된 것이다.
외교부는 주한 핀란드 대사관에 중정의 요청을 전달하며 "핀란드 측에 A가 북한에 정치 망명할 이유가 전혀 없고, 무효 여권 적발을 모면하기 위해 북한 대사관으로 간 것임을 지적하라"고 지시했다. 또 "A에게 대한민국 여권을 발급해 줄 용의가 있음을 설명하고 A의 면회 요구 등 가능한 노력을 다하라"고 강조했다. 당시 외교부의 지시는 수기 형식으로 전달됐는데, 그만큼 상황이 긴박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핀란드 당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핀란드 측은 "A는 이미 11월 29일 모스크바행 기차 편으로 떠났다"고 짧게 답했다. 이는 중정이 파악한 정보와 달랐다. 앞서 중정은 A가 11월 23일 핀란드 입국을 시도, 24일 새벽 도주, 30일 헬싱키 주재 북한 대사관에 있다고 알고 있었다. 둘 중 하나였다. 핀란드 측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중정이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핀란드 측은 A가 조사를 받던 중 어떻게 북한 대사관으로 도주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이에 주한 핀란드 대사관은 "한국 여권 소지자에 대한 경찰 조사 중 문제가 발생한 건데 우리에게 협조를 구하거나 알린 사실이 없지 않느냐"고 맞섰다. 그러나 핀란드 측은 "알다시피 핀란드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나라지 않느냐"며 "원래 이런 정보는 제공하지 않지만 양국 간 우의를 감안해 비밀리에 답해주는 것"이라며 더 이상 묻지 말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핀란드의 속내는 훗날 미국 첩보기관에 의해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됐다. 주한 핀란드 대사관은 "미국 첩보기관 제보에 의하면 A는 북한 여권을 소지해 12월 1일 헬싱키발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행 열차 편으로 출국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핀란드 정부가 이를 한국에 알리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문제를 조용하게 처리하기 위한 선의적 의도였던 것으로 판단한다"고 전했다. A가 북한 여권을 소지했다는 것은 북한이 그의 정치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A는 이미 북한으로 떠났지만 정부는 그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A는 1968년 회사 업무 차원에서 베트남으로 출국한 뒤 국내가 아닌 미국으로 향한 데다, 미국 영주권 취득을 목적으로 2번에 걸쳐 위장 결혼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미 A에게는 배우자가 있던 상황이었다. 또 어찌 된 일인지 A는 직장을 그만두고 1974년 11월부터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가발 도매 사업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A는 1976년 10월 불법 체류 문제로 미국에서 강제 추방을 당했고, 약 한 달 뒤 핀란드로 떠난 것이었다. 의문인 점은 A가 무효 여권 소지로 핀란드에 입국하지 못했는데, 해당 여권으로 어떻게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까지 도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A와 관련된 외교 문건은 그가 미국 한인 사회에서 술에 취해 불손한 행동을 했다는 동향 파악을 끝으로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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