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10건 중 1건…입증은 소비자 책임
美 '결함 증거' 없어도 '정황' 있다면 인용
디스커버리, 제조사 입증 책임 의무 부여
'시청역 참사' 등을 계기로 차량 급발진 문제와 고령 운전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급발진 의심 사고의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지고 있고, 고령 운전자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악화일로다. 급발진 의심 사고 원인을 온전히 운전자의 실수로 돌리기에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상대적 사고율이 높다는 통계만으로 고령 운전자의 면허 반납 요구도 설득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노인들의 이동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은 물론 지자체별 혜택 차이 등 실효적 측면은 깊이 고민할 지점이다. <더팩트>는 총 6회에 걸쳐 국내외 급발진 사례와 판례,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제조물 책임법과 고령 운전자 면허 반납에 대한 한계를 짚어보고 방향을 제시해 본다. <편집자주>
[더팩트ㅣ신진환·김정수 기자] 차량 급발진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자동차 결함 또는 페달 오조작이다. 원인은 분명한데 결론은 그렇지 않다. 자동차 결함의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고, 페달 오조작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에 문제는 없다'는 제조사와 '자동차가 문제다'라는 소비자 간 팽팽한 접전이 예상된다. 하지만 최근 10년간 차량 결함에 따른 급발진 인정 소송 사례는 2심에서 인용된 1건을 제외하곤 전무하다. 제조사의 완승에 가깝다.
미국은 급발진 판례를 축적한 유일한 국가로 꼽힌다. 사고 경위와 형태를 살펴보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결론은 정반대다.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을 인정한 사례가 적지 않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목격자 증언이나 전문가 분석 등 정황 증거를 대폭 수용하고, 증거개시제도(Discovery)를 마련해 뒀다. 소비자와 제조사가 최대한 동등한 위치에서 다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셈이다. 한국은 차량 결함 여부에 대한 입증 책임을 전적으로 소비자에게 돌린다.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국내 법원 판결 10건 중 1건...'정황 증거' 폭넓게 수용한 결과
2010년 이후부터 2023년까지 국내 급발진 관련 판례는 모두 10건이다. 박혜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자동차 급발진 사고와 결함 및 인과관계의 추정' 논문을 살펴보면, 모든 사건은 소비자(원고)가 제조사(피고)를 상대로 '제조물책임'을 묻고 있다. 판결 결과는 1건을 제외한 나머지 9건의 기각이었다.
압도적 수치의 기각률은 현행 제조물책임법의 한계를 방증한다. 제조물책임법에 따르면 제조물 결함 입증 책임은 소비자에게 있다. 법령에 따르면 소비자는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한 점'을 증명해야 한다. 일반 소비자들이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차량을 분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소송 시작과 동시에 한계의 벽에 부딪히는 셈이다.
실제로 기각된 판결문을 살펴보면 '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제조업자의 배타적 지배영역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정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문구가 반복된다. 소비자는 이외에도 △사고의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인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초래됐다는 점 △손해가 제조물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입증해야 한다. 그제야 제조사에 입증책임이 부과될 수 있다.
소비자 청구가 인용된 1건의 판결은 다른 판결과 달리 '정황 증거'가 '차량의 결함'이라는 의심으로 이어졌다. 법원은 △차량이 사고 장소 약 300m 전부터 200km/h 이상 속도로 갓길 주행한 점 △비상경고등이 계속 작동한 점 △큰 굉음이 들린 점 △사고 장소 이전에는 80~100km/h 속도로 운행한 점 △과속 등 과태료 부과 기록 없는 점 △사고 시각이 맑은 날인 점 △조수석에 남편이 탑승하고 운전자는 60대 여성으로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
법원은 이를 토대로 운전자가 정상 운행 중이었다고 판단했다. 이후 제조사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차량에 있다는 판결이다. 현재 해당 사건은 제조사가 상고해 대법원 판단을 앞두고 있다. 다만 충분한 정황과 증거가 인정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해석이다.
◆美, 자동차 결함 밝혀지지 않았는데 '손해배상 청구 인용'...왜?
미국은 소비자와 제조사 간 법적 공방이 '동일한 기울기의 운동장'에서 펼쳐지도록 보장하고 있다. 차량 결함의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증거개시제도를 시행하고 목격자 진술 및 전문가 진술 등 합리적 정황 증거를 충분히 인정한다. 물론 미국의 경우 주(州)법이 각기 다르고 배심원제를 시행한다. 이에 한국과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소비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해야 한다는 비판이 지속되는 만큼 미국 판결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최준규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의 '자동차 급발진사고와 제조물책임' 논문을 살펴보면 미국에서는 소비자의 손을 들어준 판례가 다수 존재했다. 판결문은 제조사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거나, 사실심리 생략판결을 파기한 경우로 모두 10건이다. 사실심리 생략판결이란 배심원을 거치지 않고 판사가 바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제조사에 유리하다.
2015년 12월 31일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면 83세 고령자 A 씨의 차량은 제한속도 48km/h 도로 주행 중 144km/h로 급가속했다. 분당 엔진 회전수(RPM)는 4000rpm까지 치솟았다. 목격자들은 △차량이 날았고(flying) △속도가 높아졌으며 △주변 차를 피해 지그재그로 운행됐고 △엔진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서 △비상등 또는 헤드라이트가 켜졌다고 증언했다. A 씨는 결국 4인 가족이 타고 있던 차량과 크게 부딪혔다. 이 사고로 A 씨는 사망했고 4인 가족 중 자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조사는 A 씨의 페달 오조작을 주장했다. 당시 정황은 제조사에 유리했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현장, 차량, CCTV, EDR(사고기록장치) 등을 분석한 결과, A 씨가 충돌 사고 발생 전까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운전자 부주의 외 명백한 사고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오작동 사고를 암시하는 코드(trouble codes) 역시 EDR 자료에 없었다.
1심은 원고 청구를 기각하는 사실심리 생략판결을 진행했다. 하지만 2심은 이를 파기했다. 준거법인 테네시주법에 따르면 원고는 '특정 결함'을 증명해야 하지만, 이러한 증명은 '정황증거'로도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원고가 정황증거에 기초해 결함을 증명하려는 경우, 원고의 주장이 더 '그럴듯하면' 충분하다고 봤다. 특히 A 씨가 30초 넘게 144km/h 속도로 800m 이상을 달리는 과정에서 페달 오조작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판결 역시 차량 결함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황 증거에 힘이 실려 원고가 승소했다. 물론 해당 사례들은 청구가 인용된 경우다. 청구 자체가 기각되거나 사실심리 생략판결을 내린 경우도 다수 있다.
◆입증 책임 덜고, 증거개시제도 도입...'결과가 정해진 싸움' 틀 깨야
미국의 경우 급발진 원인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정황증거가 충분하다면 제조사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정황증거의 인정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물론 광범위한 증거 수용은 제조사의 입지를 오히려 줄어들게 한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입증 책임이 전적으로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한국에서 정황증거 수용 확대 논의는 불가피해 보인다.
기존 관계 법령에 따라 차량의 구체적 결함을 특정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해석도 있다. 제조물책임법의 입증책임 완화 법리는 '고도의 기술 집약으로 대량 생산되는 제품의 생산과정은 전문가인 제조업자만 알 수 있어, 그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인지는 일반인으로서는 밝힐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고 돼 있다. 즉, 결함은 일반인이 알 수 없는 영역이기에 구체적 결함을 특정하지 않더라도 해당 법리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소비자와 제조사 간 법적 공방이 공평한 운동장에서 이뤄지고 있다. 특히 원고 측 전문가의 증언이 정황증거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같은 효력은 증거개시제도에서 비롯된다. 증거개시제도란 재판 전 원고와 피고 측이 각자의 증거를 공개해 사실 관계를 정확히 따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소비자의 입증 책임이 줄어들 뿐 아니라 '제조사가 결함 여부를 증명하도록 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한국에서는 증거개시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다. 제조사가 '기밀'을 이유로 거부한다면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법원의 문서제출명령 역시 강제성이 없다. 결국 소비자 스스로 자동차 결함을 증명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는 셈이다. 소비자와 제조사 간 급발진 소송을 두고 '이미 결과가 정해진 승부'라는 비판이 지속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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