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인과 결혼 위해 작업장 탈주
외교부, 도움 요청에 '인권 보호' 접근
약 9개월 도피 끝, 러시아 거주권 취득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93년 2월 어느 날, 러시아 하바롭스크 외국인등록처. 북한에서 러시아로 파견된 목수 김장운은 옷장과 벽 사이 구석에 숨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의 러시아 체류허가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었다. 김장운과 결혼한 러시아 여인 마르가리타는 애써 태연한 모습이었다. 김장운이 몸을 숨겨야 했던 이유는 명확했다. 그는 1992년 8월 23일 하바롭스크 북한 임업대표부에서 탈출한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김장운의 체류허가는 승인되지 않았다. 외국인등록처장은 "북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신청도 받지 않는다"며 마르가리타를 돌려세웠다. 두 달 동안 물밑에서 외국인등록처를 설득했던 마르가리타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그나마 위안은 김장운이 직접 체류허가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당시 북한의 '정치 경찰' 사회안전부는 김장운을 찾아내기 위해 두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만일 김장운이 외국인등록처를 방문했다면 그는 곧바로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러시아 체류가 무산된 김장운은 다른 방법을 찾기에 앞서 자살극을 꾸미기로 했다. 북한에 남아 있는 모친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조국을 등진 아들을 뒀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벌을 받게 되리란 건 자명했다. 김장운은 아무르강변에 옷과 신분증을 남기고 사라졌다. 하지만 북한 사회안전부는 김장운의 뒤를 집요하게 밟았다. 북한이 김장운 송환을 위한 지원을 러시아에 공식 요청하면서 러시아 안전부(전 KGB)와 교통경찰도 그를 찾아 나섰다.
북한 사회안전부 요원들은 김장운의 소재지를 알아내기 위해 마르가리타를 압박했다. 그녀는 물론 친자매, 친구들 모두 감시 대상이 됐다. 요원들은 마르가리타를 미행하고 자택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한편, 집 주변에 관측소까지 만들어 김장운 찾기에 주력했다. 한 요원은 한국인으로 위장해 마르가리타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러시아 안전부 요원들도 마르가리타 집을 급습해 침대와 옷장을 샅샅이 뒤졌다. 같은 시기 김장운의 동료들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외교부가 관련 동향을 확인했을 때는 1993년 2월 5일이다.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은 러시아 주간지 '젊은 극동인'에서 조만간 김장운에 대해 보도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후 총영사관은 한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김장운과 마르가리타의 서한을 확보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9년 김장운은 건설근무를 위해 북한에서 왔습니다. 저희는 서로 알게 되고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북한법에 따르면 외국인과의 사랑 또는 결혼은 금지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등록하지 못하고 비밀리에 결혼했습니다. 1992년 8월 23일에 그는 북한 작업장을 떠나 지금까지 숨어 살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장운을 찾으면 국가 반역죄로 총살할 것입니다. 그는 조국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행복한 가정을 창조했습니다. 아마 김장운은 한국 공민권을 더 쉽게 또는 빨리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나라가 문제없이 저희 사랑하는 김장운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도 김장운 없이는 못 삽니다. 귀하의 선처를 바라면서 귀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외교부는 고민에 빠졌다. 러시아 거주를 위한 수단으로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건 부적절했다. 국적을 부여하더라도 북한이 법적 관할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럴 경우 러시아와의 외교적 마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외교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김장운을 보호할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외교부는 우선 러시아 외국인등록처 관계자를 만나 러시아 국적 취득 방법을 문의했다.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러시아 외국인등록처 부처장과 접촉했다. 다행히 방법은 있었다. 김장운이 마르가리타와 공식적으로 결혼한다면 러시아 국적 취득은 가능했다. 결혼 후 2개월 뒤 김장운에게 무국적자 증명서가 발급되는데, 이후 2년간 결격 사유가 없다면 러시아 국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김장운 찾기에 혈안이 된 북한 기관원들을 오랜 시간 따돌릴 수 없었다.
외교부는 유엔난민기구(UNHCR)를 통해 김장운이 난민 자격을 확보하고, 이후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방안도 고려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유엔난민기구는 김장운과 직접 인터뷰해 그의 의사를 확인해야 했다. 유엔난민기구가 김장운을 비밀리에 만난다면 절차를 밟을 수 있을 테지만, 당시 직원은 고작 5명에 불과했고 러시아 극동까지 이동할 여력이 없었다. 유엔난민기구는 외교부에 김장운에 대한 '측면 지원'만 가능하다고 답했다.
외교부는 정치적 방면으로 우회해 김장운을 돕기로 했다. 먼저 주러시아 대사는 러시아 외무부에 '인도적 차원'으로 김장운의 신변 보장을 요청했다. 또한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달라고 일러뒀다.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하바롭스크 주지사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보좌관을 만나 '인권 보호'와 '인도적 견지'를 언급하며 김장운의 신변보호와 러시아 정착을 도와달라고 말했다.
이후 러시아 외무성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의견을 모스크바 최고회의 인권위원회에 보냈다. 이에 모스크바 최고위는 "김장운 케이스를 검토하라"는 전보 지시를 내렸고, 하바롭스크 외국인등록청은 김장운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해 성사됐다. 당시 러시아가 김장운 케이스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이유는 러시아 내 북한 노동자 인권 문제가 한창 대두됐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모스크바 최고위는 북한 벌목 현장을 직접 찾아 인권 침해 사례를 다수 확보, 옐친 대통령에게 북러 벌목계약 파기를 건의할 정도였다. 정치적 방면을 택한 외교부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결국 1993년 5월 26일 김장운은 하바롭스크 외국인등록처로부터 거주 허가를 받았다. 3개월 전 옷장과 벽 사이 구석에 숨어 식은땀을 흘렸던 그였다. 김장운은 향후 3년간 러시아 어디든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게 됐고 취업에도 제한이 없었다. 5년 후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다면 김장운은 러시아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기존 규정에 비해 러시아 정착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점을 미뤄보면, 러시아로서는 북한을 달랠 명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장운에 대한 외교부 문건은 1993년 6월 23일을 끝으로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마르가리타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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