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2000명 철회 요구' 수용 어려워"
정부, 비대면진료 허용 등 제도 손질
내달 '정원 배정 결과 발표' 후 2차전
[더팩트ㅣ박숙현 기자]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침에 반발해 시작된 의사파업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 조짐이다. 대통령실과 정부는 "의료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2000명 의대 증원 규모'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업무개시명령 등 강경 대응은 물론 비대면진료 허용 카드까지 꺼냈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제도 개선을 통해 의료 공백 장기화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정부와 의료계가 '의대 증원'을 두고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면서 치킨게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주요 병원 전공의 다수가 집단 사직서를 제출해 근무를 중단했고, 의대생들은 동맹 휴학에 나서 의사파업이 장기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000년 이후 여러 차례 의료계 파업이 있었지만 전공의 사직이 현실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라 의료 공백도 현실화하고 있다. 일손이 줄면서 상급종합병원에서 환자 진료 및 입원을 거부하는 사례가 늘었고, 방치된 환자들이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의료계와 각을 세우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김수경 대통령실 대변인은 25일 브리핑을 통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의대 정원 증원을 두고 의사들이 환자 목숨을 볼모로 집단 사직서를 내거나 의대생이 집단 휴학계를 내는 등의 극단적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라고 강한 수위로 비판했다.
또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가 지난 24일 성명을 통해 '정부가 의대 정원 방침과 관련해 '종사자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았고, 필수·지방의료 붕괴 원인들을 제대로 손대지 않고 조급하게 시행하고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데 대해, 김 대변인은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바로잡겠다"며 일일이 반박했다. 정부가 대한의사협회와의 공식소통 채널을 구성해 28차례 논의를 진행했고, 사회 각계각층과 다양한 방식으로 130차례 이상 소통했으며, 수가 인상과 의료사고 사법리스크 부담 완화, 근무여건 개선 등 필수의료 혁신전략과 정책패키지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대통령실은 "대화의 문을 언제나 열어놓고 있다"면서도 '2025년 2000명 증원 계획'은 타협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증원 규모)2000명은 정말 양보해서 최소한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의료계에서) '이걸 협상하지 않는 한 우리는 못 나온다'고 될 경우에는 아예 대화를 안 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정원에 대해 포기 안 하면 대화에 안 나온다' 이렇게 되면 저희도 좀 받아들이기 어렵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와 관련, 교육부는 최근 전국 각 의대에 추가 정원을 배정하기 위한 수요조사에 착수했고, 다음 달 각 대학별 정원 배정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또 다른 대통령실 관계자는 "다음 달에 교육부가 (정원 배정을) 넘기면 더 물러날 수 없는 것"이라며 정부의 의대 증원 계획은 이미 철회할 수 없는 단계라고 분석했다.
과거 의료계 혁신은 의사 집단행동으로 정부가 한발 물러나면서 후퇴하거나 무산되는 일이 반복됐다.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의약분업을 추진하자 의사들은 반대 투쟁을 벌였고 의약분업 전면 실시를 수용하는 대신 '의대 정원 10% 감축' 성과를 얻어냈다.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는 원격의료를 추진했는데, 역시 의사들이 집단휴진하며 반발하자 물러섰다. 2020년 문재인 정부에서도 필수·지역의료 공백을 해소한다며 의대 정원을 확대하고 공공의대를 설립하는 의료혁신을 추진했지만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백기를 들고 의대 정원 확대 방침을 접어야 했다.
역대 정권과 달리 이번에는 정부의 정책 후퇴가 없을 것이란 관측이 높다.
먼저 의대 증원을 비롯한 의료개혁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의료계 집단행동에 대해 지난 20일 국무회의에서 "절대 안 되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지난 30여 년 동안 실패와 좌절을 거듭해 왔지만 이제 실패 자체를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2000명' 증원 규모에 대해서도 "이 숫자도 턱없이 부족하다"며 축소 가능성을 일축했다. 윤 대통령이 검찰 특수통 출신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윤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22년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 등을 요구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파업에 대해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며 강경 대응했고, 이들의 파업 중단을 이끈 바 있다.
의대 증원 이슈가 50여 일 남은 총선 쟁점으로 급부상해 여론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도 정책 강행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통령실이 확고한 방침을 세우면서, 부처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분위기다.
다만 파업이 장기화할 경우 의료 공백에 따른 피해가 속출하면 정부 책임론이 불거질 우려도 있다. 정부가 출근하지 않은 전공의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렸고, 강제이행명령이나 의사면허 정지, 고발 방침까지 언급하며 압박하고 있지만 의사들의 현장 복귀는 아직인 상황이다. 정부가 사태를 조기 종료하고 의료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출구 전략이나 대응책을 철저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에 대해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이날 의료계에 "환자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환자의 곁에 있어 달라"는 당부만 전하며 말을 아꼈다. 대통령실 관계자도 "최대한 이 사태가 길어지지 않도록 정부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고, 의료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예의주시하고 있다"고만 했다.
정부는 우선 의료 공백 장기화 대응에 일찌감치 준비하는 모습이다. 지난 23일 보건의료재난 경보단계를 위기 최고단계인 '심각'으로 격상하고 공공병원 인력 투입, 수가 인상 등 '비대면 진료 한시적 확대' 카드도 꺼냈다. 비대면 진료는 현재 '의원급' 의료기관과 '재진' 환자를 중심으로 하되, 의료취약지나 휴일·야간만 초진부터 가능하도록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번 확대 방침으로 평일에도, 의료취약지가 아닌 곳에서도,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도 '초진 환자'에 대해 비대면 진료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의사 파업으로 경증 환자가 병원으로 몰리는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처다.
의료서비스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의료법을 손볼 가능성도 제기된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지난 15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비대면 진료 전면 확대와 함께 "PA(진료보조 간호사·Physician Assistant) 인력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PA 간호사는 수술·처치·처방·환자 동의서 작성·회진 등 전공의와 유사한 업무를 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 의료법상 엄격히 따지면 불법으로 간주된다. 정부는 의료법 개정보다 시행령 개정을 통해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는 방침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간호사 단체는 "의료현장에서 법의 모호성을 이용한 불법진료행위가 근절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간호법 제정이 재추진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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