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줄여 비례성 높이고 다양한 목소리 반영
정당 이합집산·책임정치 훼손으로 불안정
비례대표 확대시 '정당 공천개혁' 필수
정당의 얼굴을 대표하는 비례대표는 정당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린다. 우리나라는 전체 의석 300석 중 47석만 비례대표로 선출한다. 선거제 개편 논의가 뜨거운 가운데, '비례대표 확대' 방안이 대두되고 있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비례의원들, 비례대표 제도 자체에 대한 유권자 신뢰는 두텁지 않다. <더팩트>는 21대 국회에서 활동하는 비례대표 의원 47명의 주요 의정활동과 이들에 대한 인식을 짚어보고, 22대 총선 준비 현황을 살펴봤다. 아울러 비례대표제가 지금의 '양극단 혐오 정치'를 바꿀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지 총 세 편에 걸쳐 짚어봤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새해 초부터 정치권에서 '선거제 개편' 논의가 뜨겁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비례위성정당 출현으로 취지가 퇴색되자, 이번에는 반드시 제도를 보완해 대표성을 높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여러 개편안 가운데 '비례대표 확대'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표를 줄여 비례성을 높이는 동시에 의원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 대표성도 지금보다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화가 안 된 소수정당이 여기저기 등장하고 상대적으로 책임정치가 약해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 지역 기반 중심의 한국 정치 현실과 맞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전문가들은 비례대표 장점이 발휘되기 위해선 확대하기 전 상향식 공천 입법화와 구체적인 공천 기준 제시 등 "정당개혁이 선행 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비례대표 확대로 비례성·대표성 제고 효과..."정책 경쟁 가능할 것"
우리나라의 비례대표제는 1963년 처음 도입됐다. 다만 당시에는 각 정당 지역구 의석수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배정했기에 거대 양당에 유리했다. 유신헌법으로 폐지됐던 비례대표제는 11대 총선 이후 부활해 16대 총선까지 지역구 의석수 또는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정당별로 의석을 배분하는 '전국구 비례대표제'가 유지됐다. 이후 전국구 비례대표제가 위헌 결정을 받자 17대 총선부터 지역구 선거와 별도로 정당투표를 실시하는 현행 비례대표제가 탄생했다. 비례대표는 사표를 줄여 비례성을 높이고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정책 경쟁이 가능한 다당제 구조가 정착될 수 있다는 기대를 받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다양성이 갈수록 중시되면서 단순다수제에서 비례대표제로 전환하는 추세를 보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이 펴낸 '2022년도 각국의 선거제도 비교연구'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100%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스웨덴·덴마크·네덜란드 등 17곳(상·하원 포함)이다. 다수대표제를 채택한 국가는 영국, 미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등 5곳(하원 기준)이며, 다수대표·비례대표 혼합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8곳이다. 단순다수투표제를 시행했던 뉴질랜드는 1993년부터 혼합형 비례대표제로 바뀌었고, 이탈리아,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멕시코도 지금은 혼합제를 채택하고 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제 개편 방향으로 학계, 시민단체에선 입을 모아 '비례대표제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극단으로 치닫는 양당제를 종식하고 다당제 토양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꼽는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는 정당 간 '협치'가 원활해질 수 있다며 다당제에서 정치가 안정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비례대표 확대하면) 지금보다는 원내에 들어가는 정당의 숫자가 많아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가 불안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선진국 중에 정치가 대표적으로 불안한 나라가 오히려 양당제 소선거구제 하는 미국이나 영국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왔다 갔다 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며 "다당제 국가들은 정당 간의 협치나 연립이 잘 되면 오히려 정치가 안정되는 모습을 보인다. 독일 같은 나라가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문제는) 정치 협치나 연립을 어떻게 촉진할 것이냐인데, 방법은 정당 간 연합이다. 정책이나 공약 중심으로 정당 간에 공식적으로 연합하고 연합 측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또 협치가 가능하다. 지금은 각 정당이 후보를 공천할 수 있게 돼 있는데 복수의 정당이 연합 공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면 여러 정당들이 국회에 들어오더라도 선거 전에 미리 정책 중심으로 정당이 연합을 해놓으면 그게 연립 정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또 거대 양당 사이에서 정권이 교체되면서 일어나는 정책의 불일치도 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장승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어차피 완벽한 선거제도를 찾는 건 아니다. 모든 선거제는 다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비례대표제를 확대해서 책임 정치가 조금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는 비례대표를 확대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이 지금 현재 더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현장 뛰는 정치인·실무진은 '글쎄'
비례대표제를 확대할 경우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점은 정국 불안정이다. 작은 정당에 유리한 제도이다 보니 지금보다 더 극단적인 목소리가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 현행 대통령제에 적합할지도 문제로 지적된다. 군소정당 다수가 원내에 진출하면 여소야대 구도가 반복되면서 연정을 구성하거나 책임을 묻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협치'와 '연합'이 현실에선 쉽지 않다는 게 정치권 시각이다.
국민의힘 3.8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5선 조경태 의원은 '비례대표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 정도로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의석수의 한계로 특정 직능 단체만 대표하게 되고, 다수 정당 간 뜻을 모으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비례대표를 확대하더라도) 다양성 보장이 안 된다. 직능이라는 게 그렇게 따지면 비례대표 의원들을 만 명은 해야 한다. 또 지역구 의원들도 충분히 전문성,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비례대표제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는 공천 문제도 비판했다. 조 의원은 "옛날부터 (공천 시스템) 개선한다고 했지만 개선이 됐나. 진짜로 직능을 대표해 국가 발전을 위해 일하는 비례대표가 몇 명 있나. 비례대표는 결국 다들 지역구에 가기 위한 하나의 발판으로 삼는다"고 비판했다.
당원이나 일반인이 비례대표 순위 선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개방형 명부' 방식에 대해서도 특정 지지 세력 목소리가 과대 대표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조 의원은 "비례대표는 국민들이 뽑을 기회가 (지역구 의원보다) 없다. 정치 수준이 높으면 그렇게 해도 되지만 우리나라 정치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도 양당인데도 매일 싸우는데 다당제가 되면 더 많이 싸울 것이다. (연합 정부 구성도)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시 의회에서 활동하는 익명의 정치권 관계자도 현실에선 다당제 효과가 크지 않을 것으로 봤다. 각 정당이 연합하고 협치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지목했다. A 관계자는 "비례대표제는 작아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확대하게 되면 당을 쉽게 만들고 깰 수 있는 속성이 커질 수 있다. 비례대표제를 주장하시는 분들은 '협치'를 말씀하시는데 여러 세력이 들어오니 더 극단적인 정치적 목소리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가운데로 모여 협력하고 타협하는 길로 가기보다 양극단으로 휘둘릴 수 있다. (다당제가 되면) 태극기 부대, 촛불집회 세력이 원내에 들어올 텐데 협치를 기대한다는 건 뭔가 현실을 안 보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당이 제도화가 돼야, 즉 안정적으로 의견 수렴하고 정책을 집행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받는 책임의 순환고리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데 흩어졌다 하면 더 불안정해진다. 그때그때 여론에 따라 막 휘둘리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자꾸 제도가 바뀌면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생각한다. 정당이 자기 역할을 하면서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제도를 좀 바꾸는 건 긍정적이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다원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 없이 제도를 통해 여러 정당이 나오면 그게 다원주의인 것처럼 인식하는 건 아닐까" 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당 간) 연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나라들도 쉽게 되지 않았다. 시간도, 희생도, 노력도 많이 필요할 텐데 (정치권이) 별로 그렇게 안 하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현재 선거제 개편안으로는 '개방명부형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박주민 의원안이 주목받고 있다. 전국을 30~40개의 권역으로 나눠 정당 지지도에 따라 한 선거구에서 6~11명씩, 총 253석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이와 별도로 현재 비례대표 47석은 정당별 전국 득표율과 실제 얻은 의석 비율의 불일치를 보정하는 '조정 의석'으로 활용해 소수정당도 득표율만큼 의석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대해 국회의원 지역 사무소에서 다수의 활동 경험이 있는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는 "광역 비례대표제가 되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지역 현안에 치중하게 될 수도 있다. 지역 경계가 크기 때문이다. 또 (공천 과정에서) 암투가 더 난무하게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인구 비례만 보고 권역을 크게 나눌 경우 지역 대표성과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것이란 지적도 있다.
◆"공천 시스템 투명하게...정당 개혁 선행돼야"
비례대표제의 장단점을 떠나 확대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국민 불신'이다. 그동안 불투명하게 운영되면서 공천헌금, 밀실거래 등 여러 논란을 초래했던 공천과정과도 무관치 않다. 현행 비례대표는 '폐쇄형 명부제'로 유권자는 선호하는 정당만 선택할 뿐, 정당이 명부순위를 정한다. 공직선거법에 나와 있는 비례대표에 관한 규정은 '후보자를 추천하는 때에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야 한다' '절반은 여성으로 하되, 홀수 순위에는 여성을 추천한다'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각 당이 비례 공천 기준을 확정한다. 바꿔 말하면, 정당 지도부 마음이다. 때문에 학계와 정치권 모두 비례대표를 확대해게 된다면 유권자 참여를 늘리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 대표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독재 정권에서 국회 의석을 쉽게 얻으려고, 대통령이 측근들을 국회의원 시켜주려고 전국구 형식으로 도입된 게 비례대표 불신의 근원이다. 그러다 보니 유권자들은 비례대표라는 건 정당이 순서까지 다 정해버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많은 비례대표제 국가들은 유권자들이 후보까지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개방형 명부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에 이걸 도입하면 지금처럼 정당이 마음대로 공천하기 어려워지게 되고 전체적인 정당 개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문 교수도 "선거 제도 비례대표성을 높이기 전에 정당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당 개혁이 안 된 상태에서 비례대표를 확대하게 되면 기존 양당 체제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이들이 군소 정당을 만들어서 기존의 양당 체제 정치 엘리트들은 유지되고 당만 여러 개로 쪼개지게 된다"며 "폐쇄형 명부로 당 지도부 측근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선발하는 공천 제도를 유지하면서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면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후보 비율은 줄고 여러 군소 정당만 난립하게 돼서 지금보다 더 안 좋을 것"이라고 했다.
'개방형 명부'도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지금의 폐쇄형 명부에선 소위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들이 앞순위에 배정되는데 당원과 국민이 직접 뽑는 완전 개방형에선 비례대표제 취지와 달리 주류의 목소리를 대표하거나 인지도가 높은 이들이 선출될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다.
정당의 책임 정치가 취약해질 수 있는 점도 보완해야 한다. 문 교수는 "개방형 명부는 정당을 약화한다. 비례대표 후보 입장에선 지역구에서 열심히 해서 자력으로 당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 당론을 따라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유권자들이 투표하지만 일정한 당선 기준이나 자격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부분 개방형이 필요하다. 또 비례대표들은 의회에 진입하게 되면 자기 집단의 이익만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정당에서 당론을 결정하면 당론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강한 징계를 내리거나 다음 선거에서 높은 순위를 주지 않는 식으로 (내부 의견을) 타협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 교수는 "지금의 한국 정당은 전문성을 명분으로 의회에 진입한 이들이 대표 기능은 수행하지 않은 채 계속 정쟁만 일삼고 있다. 의회와 시민사회가 단절되고, 그래서 국민은 국회를 불신한다"며 "선거제도보다 정당 개혁이 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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