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내 민주적 소통 활성화, 유능한 야당 준비해야 국민 신뢰 회복
[더팩트ㅣ박숙현 기자] "나는야 주스 될 거야 / 나는야 케첩 될 거야 / 나는야 춤을 출 거야~"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어느 글을 읽고 이마를 탁 쳤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한 고등학생이 대학 입시 자기소개서에서 동요 '멋쟁이 토마토'를 써 원하던 철학과에 합격했다는 일화였다. 글쓴이는 '세 번째 토마토'의 삶을 살기 위해 철학과에 지원했다고 했다. "스스로 사유해 삶을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스스로 사유함'은 집단에도 매우 중요한 발전 요소다. 스스로의 생각에 따른 행동을 해야만 잘못된 결과가 발생했을 때 온전히 책임지고 고칠 점을 찾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옳지 않은 행동을 저지른 뒤에도 누군가의 뒤에 숨고,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단적인 예로 자주 언급되는 게 유대인 수백만 명의 학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그는 자신의 고유 사유 능력을 상실한, 전체주의에 길든, 충직한 관료로 알려져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공고한 구조 속에서 체제에 순응하고 폭력에 대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졌다고 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나치가 아돌프 히틀러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명령에 의해서만 유지된 건 아니라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동참하는 가해 행위자들 간에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자기 인식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능동적인 네트워크를 쌓고 상호작용하면서 파괴력은 커지고, 상대의 악마성은 구체화됐다는 분석이다.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20대 대선 중 양 진영 간 극성 지지층과 이에 동조하는 정치인들에게서 전체주의의 향기를 살짝 느낄 수 있었다. 유세 현장에 가보면 욕설과 비방이 난무했다. 상대 후보는 '이 세상에 다시 없을 나쁜 놈'이었다. 일부 지지자의 극단적 행동을 말려야 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부추겼다. 상대 진영을 향한 의혹 제기 수준의 비난은 지지자들의 집단적 파괴력과 만나 고장 난 브레이크처럼 '진짜 뉴스'로 둔갑했다.
대선이 끝난 지금이 더 걱정이다. 국민의힘은 상대를 향한 비난은 잠시 거두고 차기 정부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달콤한(?) 내부 다툼을 하느라 바쁘지만, 민주당은 패배를 책임질 사람이 누군지를 두고 살벌한 '네탓 공방' 중이다. 상대 진영을 향했던 칼날이 이제는 내부를 겨누고 있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이른바 이낙연계와 이재명계의 대립 구도가 수면 위로 올라온 듯 보인다. "원팀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내용적으로 결합이 완벽하게 안 됐었다"는 김두관 민주당 의원의 말로 현재 상황이 요약된다.
문재인 정부 책임론을 두고도 집안싸움 중이다. 일각에서 문 정부 시장 정책 실패를 대선 패배 주요 요인으로 지목하고, 조국 사태와 부동산 실패 책임자들을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친문 진영은 "문 정부가 '과'로만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공개 반박했다.
역대 어느 선거에서나 지고 나면 책임론은 들끓기 마련이지만 0.73%포인트 차로 석패한 터라 '쇄신' 주도권을 놓고도 물밑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높은 정권교체론을 극복하고 민주 진영 계열 정당에서 역대 최다 득표율을 기록한 이재명 당 상임고문이 주축이 되어 쇄신해야 한다는 측과, 6월 지방선거까지 안정적인 인물로 당 수습과 쇄신을 동시에 하자는 측으로 나뉜다.
이 과정에서 일부 극성 지지층의 집단행동은 대선 때보다 더 격한 모습이다. 민주당 다수 의원들은 윤호중 공동비상대책위원장 사퇴와 '이재명계' 박홍근 민주당 의원을 차기 원내대표로 선출하라는 일부 지지자들의 항의성 문자,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낙연계'로 분류되는 배재정 비대위원은 "'대선에서 국민의힘 도운 것 아니냐' '뭘 했다고 비대위 자리 꿰찼느냐' '양심 있으면 자진사퇴하라' 등 더 심한 말들도 많이 있다"며 "분열의 언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난을 중단해달라"고 호소했다. 오죽하면 박 의원조차도 지지자들에게 "의원들은 업무를 보기 힘들어 하고 향후 당내 깊은 갈등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매우 커졌다"라며 자제를 당부하는 문자를 보냈다.
민주당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우선 '일부 지지자들의 과분한(?) 사랑을 내려놓을 용기'가 필요하다. 이른바 '인신공격성 문자폭탄' 현상은 지난해 4·7 재보궐 선거 패배 이후 당 쇄신 논의 과정에서도 나왔지만 당 지도부가 방치한 경향이 있다. 당시 일부 정치인들은 '직접민주주의의 발현' '시민행동'으로 미화했고, 이들의 발언권은 전체 당원들보다 과대 대표됐다. 정치인들의 자율성도 침해됐다. 민주당 중진 이상민 의원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당의 결함 중 하나가 맹종·일색에 성역화를 한다는 것"이라며 "패거리 정치가 활개를 치면서 다른 목소리가 스며들 틈이 없다. 그런 열성 지지층이 있다는 게 자산이면서도 부담"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 내부에 제때 제 목소리를 내고, 다양한 의견이 모이는 민주적인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아울러 여당과 통 크게 협치할 수 있는 유능한 야당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20일 기자회견에서 윤 비대위원장이 밝힌 당 쇄신안을 보면 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는 "민주당은 대선에서 패했지만, 원내 1당으로서 국정을 운영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며 △기초의원 중대선거구제 도입, 위성정당 창당방지 제도 개선, 제왕적 대통령 권한 분산 헌법 개정 등 정치개혁 △검찰개혁 △언론중재법 처리,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 언론개혁 △대장동 특검 △평등법 제정 등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8일 '국민 약속 실천' 입장문에선 보이지 않았던 검찰·언론 개혁, 평등법 제정이 추가됐다. 민주당 내에선 대선 패배 원인이 당 지도부가 개혁을 치열하게 추진하지 않아서라는 측과, 개혁을 밀어붙이느라 민생을 소홀히 했다는 측으로 나뉘는데 전자의 진단을 받아들여 강한 쇄신 드라이브를 걸겠다고 밝힌 셈이다.
이 가운데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 엄격 분리를 핵심으로 하는 '2차 검찰개혁' 추진은 검찰 출신 대통령과의 전면전을 예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추진의 명분이다. 민주당은 '1차 검찰개혁'이라 불리는 검경수사권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을 마무리 짓고, 2차 검찰개혁을 추진하려 하려다 청와대에서도 제동을 걸어 중단한 바 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윤 위원장은 1차 검찰개혁 제도 안착에 시간이 소요돼 대선 이후로 미루게 됐다는 점과 특히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당선된 상황이기 때문에 검찰개혁의 추가 완성이 어려울 수 있고, 1차 개혁조차 후퇴할 우려가 있어서 정권이 바뀌기 전 검찰개혁을 마무리 짓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대선 과정에서 '2차 검찰 개혁'에 앞장서겠다는 메시지를 낸 적이 거의 없다. '유능한 경제대통령'이 대선 슬로건이었다. 또 2차 검찰개혁 중단의 이유였던 1차 검찰개혁 제도가 1년여 만에 안착됐다는 진단과, '검찰 개혁 후퇴'를 지레 짐작해 당장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명분이 와닿지 않는다. '검찰개혁은 국민의 요구'라는 주장이 무색하게 민주당은 재집권에 실패했다. 대선의 민심은 '민생'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172석이 거대 야당으로서 여당의 잘잘못은 따지되, 발목잡기 하거나 밀어붙이려는 태도는 내려놓아야 한다.
쇄신안 발표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겨울'은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윤 위원장 사퇴 요구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오는 24일 원내대표 선거 결과에 따라 계파 갈등은 더 심해질 수 있다. 이번 비대위는 6월 지방선거 공천권을 쥔다. 민주당 의원들은 너도나도 '자리욕심'이 없다며 쇄신에 앞장서야 한다고들 하지만 지방선거, 차기 총선 불출마 선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욕심을 내려놓아야 '특정 인물' 중심의 쇄신이 아닌, 미래 의제에 대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 "검찰·언론 개혁하겠다"는 맹목적인 지향성을 내려놓았으면 한다. 세 번째 토마토의 마음처럼 휘둘리지 않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초심으로 돌아가 혼란을 수습하고 도약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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