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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기획-'친문' 권력의 해부①] '킹메이커' 이해찬의 큰 그림으로 탄생한 '친문'

  • 정치 | 2020-12-06 00:01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스스로 '폐족'이라 칭했던 '친노'는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친문'으로 변신했다. 2011년 8월 17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혁신과 통합' 제안자 모임 및 기자회견을 할 당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왼쪽)과 이해찬 시민주권 대표. /이해찬 싱크탱크 '광장'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스스로 '폐족'이라 칭했던 '친노'는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친문'으로 변신했다. 2011년 8월 17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혁신과 통합' 제안자 모임 및 기자회견을 할 당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왼쪽)과 이해찬 시민주권 대표. /이해찬 싱크탱크 '광장'

여권 내 대권 구도가 출렁이고 있다. 김경수 경남지사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징역형을 선고받자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친문(親文)그룹'이 공개적으로 이낙연 대표와 이재명 경기지사 이외의 '제3후보론'을 언급하며 판 키우기에 나섰다. 2004년의 친노(親盧)는 집권당의 주류가 된 동시에 구심력을 잃고 분화했다. 친문으로 진화한 이들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포스트 문재인'을 찾기 위해 몸을 풀고 있다. <더팩트>는 2012년 문재인 대통령이 친노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면서 '친노의 친문화'가 진행된 과정, 21대 국회에서 세분된 친문 계파를 정리하고, '친노그룹'의 후계자 선택 방정식을 2020년 현재에 적용해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차기 대권 구도를 전망한다. <편집자 주>

2011년 '혁신과 통합'으로 편입…대선·총선 거쳐 '친노의 친문화'

[더팩트ㅣ국회=박숙현 기자] 지금은 명실상부한 집권당 최대 계파로 자리 잡았지만, 친문(친문재인)의 출발은 스스로 '폐족'이라 칭했던 친노그룹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0년대 후반 참여정부 청와대를 나온 인사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모였다. '친노 좌장'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들과 시민사회 단체, 노동계 등을 화학적으로 결합해 '친노의 친문화'를 추진했다. 인적 연결고리로 느슨하게 묶여있던 친문은 2012년 총선과 대선, 2016년 총선을 거치면서 가치와 정책,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탈바꿈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국민의 재평가 열기는 뜨거웠다. 이해찬 전 대표 등 친노그룹은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대선 출마를 설득했다. 2016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도식이 열린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박수치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더팩트 DB

◆'온라인 당원제'로 당권 장악한 '친노·친문계'

정치권에선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을 1년 앞둔 2011년을 친문의 형성 시점이라고 본다. 당시 친노 세력은 손학규 전 대표, 유시민 현 노무현재단 이사장, 정세균 현 국무총리를 지지하는 그룹으로 삼등분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 참여정부 근무 경력이 있던 이들, PK(부산·경북) 지역에 기반을 둔 이들이 '문재인'을 중심으로 뭉쳤다. 시민사회수석을 지낸 이정호 부경대 교수, 이호철 전 민정수석, 전해철 의원, 소문상 전 정무비서관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비서관 그룹 중에선 지금까지도 핵심 친문 역할을 톡톡히 하는 이들이 있다.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과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을 지낸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은 지난 4·15 총선에서 총선 전략과 인재영입 실무를 총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참여정부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 출신 윤건영 의원은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국정기획상황실장을 거쳐 21대 국회에 입성했다. 최인호 의원(전 부산광역시당 위원장)과 송인배 전 사회조정비서관(전 양산지역위원장)도 원조 친문으로 꼽힌다.

문 대통령이 정치계 입문을 결심하기 전 이들 중 몇몇이 모여 그의 경남 양산 집 옆 계곡 위 평상에서 '향후 정치 정세와 민주당 통합 방향'을 토론하며 '도원결의'를 다진 이야기는 정치권에서 유명하다.

친노 좌장 이해찬 전 대표는 이들과 함께 소수진보당, 시민사회계, 한국노총 등과 합쳐 민주진보 진영 대안정당인 '혁신과 통합'을 탄생시키고 문 대통령을 상임대표에 올렸다. 이 과정에서 합류한 시민단체 집단의 대표적 인사는 당시 시민통합당 대표였던 이용선 의원, 남인순 의원, 김광진 현 청와대 청년비서관 등이다. 시민사회 인사 일부는 훗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당선으로 '박원순계'로 성장한다. '재벌 저격수'로 유명한 박용진 의원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오래 활동하다 이때 민주당에 합류했다.

혁신과 통합 측은 야권 단일후보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으로 민주당과의 통합 협상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2011년 10월 혁신과 통합 측이 박 후보를 방문한 모습. 왼쪽부터 이용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박 전 시장, 이해찬 시민주권 대표. /더팩트 DB
혁신과 통합 측은 야권 단일후보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으로 민주당과의 통합 협상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2011년 10월 혁신과 통합 측이 박 후보를 방문한 모습. 왼쪽부터 이용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박 전 시장, 이해찬 시민주권 대표. /더팩트 DB

빅텐트 아래 모였지만 정책 노선과 방향은 불분명했다. 이 전 대표는 2011년 10월 '통합정당 추진 방안 제안 설명회' 당시 "집단 간 견해 차이가 있고 통일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 연합하는 정당이기 때문에 서로 당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정책 노선을 공유하고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당시 혁신과 통합에 참여했던 A 의원은 <더팩트>와 통화에서 "혁신을 전제로 통합한다는 기조였다"며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정책 비전도 혁신해야 하고, 정당 운영 방식이나 구성, 공직후보자 선출 제도도 이른바 '미국식 오픈프라이머리'를 적용한 국민경선 제도로 바꿔나가자는 의견이 모였다"고 회상했다.

이 전 대표는 당시 대선 출마를 위해 외연 확장이 절실했던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표에 당 대 당 통합을 제안하면서 개방형 온라인 당원제를 제안했다. 공직후보자 선출 과정에 시민들의 참여를 대폭 보장할 수 있는 당 구조를 제시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권 장악을 위한 묘수였다는 평가다.

A 의원은 "이쪽은 당원이 없고, 민주당은 당원이 있기 때문에 국민선거인단 제도를 도입하고 현장 투표뿐만 아니라 이른바 휴대폰 온라인 투표도 실현하자고 했다. 경선 시스템도 완전히 개방해 광범위한 지지자들을 담아낼 수 있는 방식으로 민주당을 개방했다. 그 전제로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었다"고 설명했다.

친노·친문계는 민주통합당 신당 창당 이후 당 대표와 대권후보를 배출했다. 2012년 1월 15일 민주통합당 대표에 선출된 한명숙 대표. /더팩트 DB
친노·친문계는 민주통합당 신당 창당 이후 당 대표와 대권후보를 배출했다. 2012년 1월 15일 민주통합당 대표에 선출된 한명숙 대표. /더팩트 DB

지분을 바라지 않았지만, 손쉬운 정당 가입으로 당 내부에 친노계와 문재인 지지층이 급격히 유입됐다. 이들의 힘은 곧바로 나타났다. 통합 직후 열린 2012년 1·15 전당대회에서 '친노 대모' 한명숙 대표가 손학규계로부터 당권을 탈환했다. 아울러 개방형 온라인 당원제로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문 대통령을 필두로 전해철, 김현(전 청와대 춘추관장), 박남춘(전 청와대 인사수석), 김용익(전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 윤후덕(전 청와대 국정과제비서관) 등 친노·친문계 참여정부 인사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했다. 한 대표 뒤를 이어 6·9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대표가 당권을 잡으며 친노·친문계는 명실상부한 당의 주류 계파로 등극했다. 다만 이때만 해도 문 대통령은 '친노의 수장'으로 불렸다.

친노와는 거리가 멀지만 문재인을 지지하는 순수 '문재인계', 이른바 신문(新文)이 형성된 시기는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을 거치면서다. 문재인 대선 캠프에서 중요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주목을 받았다. 우윤근(공동선거대책본부장)·추미애(국민통합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노영민(비서실장)·이목희(기획본부장)·박영선(선대위 공동위원장)·홍영표(상황실장)·윤호중(사무총장)·윤관석(대변인)·진선미(대변인) 등이다.

◆18대 대선 패배 뒤 2016년 총선 거치며 확장·공고해진 친문

18대 대선 패배 후 친문은 당내 비주류로 전락했다. 참여정부 비서진 출신과 대선 캠프 출신은 노영민 현 대통령 비서실장, 전해철 의원을 주축으로 이른바 '문지기(문재인을 지키는 모임)'를 결성해 정치적 재기를 준비했다. 문지기는 '부엉이 모임'이라고도 불린다. 문 대통령은 2년 이상 이어진 잠행을 마치고 2015년 2월 2·8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박지원 의원을 제치고 당권을 거머쥐며 친문의 귀환을 알렸다.

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맡으면서 친문 시대가 본격화했다. 대표 측근과 20대 총선을 대비해 문 대통령이 직접 영입한 외부 인재들이 국회에 입성해 주요 역할을 맡았다. '문재인 호위무사'라는 별칭이 있는 최재성 현 청와대 정무수석(전 총무본부장)과 진성준 의원(전 전략기획위원장)이 대표적이다.

문 대통령은 2016년 1월까지 대표 겸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아 친문에 새 인물을 수혈했다. 이른바 '문재인 키즈'다. 조응천·이철희·표창원·김정우·김병관·김병기·박주민·오기형·양향자 등이 대표적이다. 박주민 의원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 중 세월호 유족을 변호한 것을 계기로 문 대통령이 직접 영입했다. 조응천 의원도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으로 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을 그만두고 해물음식점을 운영하다 문 대통령의 삼고초려에 여의도에 입성했다. 양향자 의원은 '호남 홀대론' 민심을 뒤집기 위한 카드였다. 20대 총선에선 중진 천정배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에 밀렸지만 21대 총선에서 압승했다. 다만 이들 모두가 친문 핵심과 정치 성향·정책 노선을 공유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시선이 있다.

2016년 총선은 '대권주자 문재인'과 친문에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당과 대중에 '차기 대권주자'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대안으로 등판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20대 국회에서 친문계가 다수 생환하면서 당내 최대 계파로 뿌리내렸다. 총선 후 치러진 8·27 전당대회에서도 추미애 의원, 전해철 의원, 양향자 광주 서구을 지역위원장, 김병관 의원 등 친문계가 지도부에 대거 입성하면서 19대 대선 때 당이 문재인 후보를 구심점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국민의 재평가 열기는 뜨거웠다. 이해찬 전 대표 등 친노그룹은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대선 출마를 설득했다. 2016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도식이 열린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박수치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더팩트 DB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국민의 재평가 열기는 뜨거웠다. 이해찬 전 대표 등 친노그룹은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대선 출마를 설득했다. 2016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도식이 열린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박수치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더팩트 DB

◆'노무현 정신' 후계자로 선택받은 문재인

2011년 당시 통합 흐름에 참여했던 이들은 폐족이었던 친노를 다시 규합해 친문화 하기까지 야권통합을 주도한 이 전 대표의 역할이 컸다고 입을 모았다.

A 의원은 "2010년만 해도 이 전 대표나 친노는 스스로를 폐족이라고 생각하고 본인들이 나서는 데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정부 정책적 한계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공유하면서 경제민주화 등을 시대 과제로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들을 끌어내 만든 게 혁신과 통합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전 대표가 정치적으로 가장 훈련된 선배 지도자였기 때문에 혁신과 통합에서도 가장 중심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원조 친문으로 분류되는 B 의원도 "이 전 대표가 당시 싱크탱크 '광장'을 운영하면서 친노 진영을 조직적으로 결집하는 한 축을 갖고 있었다. 또 참여정부 때 국무총리를 했다는 상징성도 있었고, 이 전 대표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야권통합 추진 당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대선후보로 택했던 이도 이 전 대표를 필두로 한 소수 친노계였다. A 의원은 "공식적으로는 문 이사장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분위기는 없었지만, 이 전 대표나 정치권에 오래 있던 사람들 머릿속에는 현실적으로 '문재인 카드'가 유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문 대통령은 고민이 깊었지만, 이 전 대표가 대선까지 나가라고 해서 끌려 나온 편"이라고 했다.

친노는 왜 문 대통령을 택했을까. B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추모 열기가 있었고, 그때 반드시 다시 뭉쳐 정권 교체를 해내자는 대의가 형성됐다. 하지만 2011년 당시 민주당은 차기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후보나 당 준비 여건이 제대로 안 갖춰져 있었다. 그러면서 누가 적임자인가에 대한 논의가 대두됐는데 '노무현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후보가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서 승리할 수 있고, 결집할 수 있다는 흐름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게 문 대통령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노 전 대통령 추도식 때 냉정함을 잃지 않는 이미지가 국민에 깊이 각인돼 있었다. 그러면서 친노 세력에 문 대통령에 대한 신뢰감이 많이 쌓였던 것 같다. 노 전 대통령을 연상하게 하는 등 정서적인 일체감을 느꼈다. 또 참여정부 비서실장, 민정수석 때 능력을 친노 진영에서 확인했고, 개인에 대해서도 진정성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대권주자로 만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A 의원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재평가가 있었고 또 당내 이렇다 할 대선주자도 없었다. (당시 대권주자였던) 정세균 총리에 대해선 새로운 시대를 이끌 대통령감이냐에 대해 여론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학규 전 대표는 당을 옮겨와서 그런지 민주진영에서 정체성 문제가 제기됐다. 결국 야당 세력을 끌어안으면서 진검승부를 할 만한 후보가 누구인지 고민한 끝에 폐족 딱지를 벗고 도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문 대통령을 끌어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대표가 주도한 혁신과 통합은 전국에서 세력을 끌어모아 존재감을 최대치로 키웠고 민주당과의 통합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어 신당에서 대선후보와 당 대표를 배출하면서 친노·친문계가 안착하면서 이 전 대표의 9년 전 호언장담대로 수권정당이 됐다.

unon89@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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