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당(公黨)의 책임정치 논란, 유권자도 책임을 져야
[더팩트ㅣ김병헌 기자] 1636년 12월,남한산성에서는 격론이 벌어진다. 인조를 가운데 두고 주전파는 "임금 이하 백성이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야 한다", 주화파는 "우선 항복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명분을 내세운 주전파의 목소리가 컸지만 인조는 고심 끝에 주화파의 현실론을 받아들여 청 태종에게 항복한다. 전쟁은 끝난다.
명분에 바탕을 둔 논리는 무엇보다 명쾌하다. 이해가 쉬워 설득력도 있다. 반면 현실론은 어렵고 피곤하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 않느냐’며 한 자락 깔고 시작해야 한다. 공격에 대한 방어도 어렵다. 진영논리가 정의와 진리를 누르고 있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상대방은 차치하더라도 구성원이나 국민 대다수가 수긍하기는 정말 힘든 것이다. 최종 결과가 현실론에 부합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당사자가 국가경영을 책임지는 여당이라면?
욕을 먹더라도 국민의 삶을 먼저 생각하고 억울함도 참으며 대안을 제시한 주화파의 자세가 필요하다. 개인이라면 좀 손해 보더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명분을 찾을 수도 있지만, 국가미래에 대한 문제라면 아니다.
내년 4월 7일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 후보를 내기 위한 당헌 개정 여부를 묻는 더불어민주당 당원투표를 실시한 결과 찬성이 86%였다. 최소한의 명분은 만들었다.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향후 보선 공천 준비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최인호 수석대변인은 2일 "찬성률 86.64%를 기록했다"며 "재보궐 선거에 공천해야 한다는 전 당원 의지의 표출"이라고 평가했다. 민주당 당헌은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의 중대한 잘못으로 재·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5년 당 대표 시절 만든 규정이다. 규정에 따르면 서울·부산시장 선거에 후보를 낼 수 없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성추문으로 인해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찬성률이 높은 것에 대해 최 수석대변인은 특히 "이낙연 대표와 지도부의 결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지난 3월 ‘비례정당’ 창당을 앞두고도 전 당원 투표를 진행했다. 당시 찬성이 74.1%였다. 명분보다 현실론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당시 비례정당을 창당하지 않는 것이 명분에는 더욱 부합할 수는 있었다. 이후 국민 선택의 결과는 엄청난 압승이었다. 7개월 만에 다시 등장한 민주당의 전당원 투표에 대해 야당이 그때보다도 다욱 강하게 몰아치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보궐선거 공천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3차 가해"라며". 민주당 지도부가 비겁하게 당원 뒤에 숨어 양심을 버리는 것은 국민이 거여(巨與)에 바라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국민의당 소속 국회 여성가족위 위원들은 "후보 공천으로 선거 과정에서 두 전 시장의 성 추문 사건이 다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불필요한 억측을 야기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들에게 큰 고통"이라고 지적했다. 정의당도 "책임 정치라는 약속어음을 발행하고는 상환기일이 돌아오자 부도내는 행태"라고 비난했다.
민주당 약속 번복의 수단을 놓고 지도부가 도덕적·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당원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당원위임 민주주의’라는 냉소적 진단도 나왔다. 또 당장의 선호를 취합하는 데 그치는 전당원 투표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는 끊이지 않는다. 반복될 경우 정치적 냉소와 혐오를 키울 수 있다는 학자들의 우려도 있으며 ‘당원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아닌 ‘당원의 도구화’라는 비판도 있다.
국민의힘이 문 대통령을 직접 거론한 데는 서울시장 선거를 의식한 영향이 크다고 본다. 부산 선거는 유리하다고 판단하지만, 서울시장 출마 당내 후보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성추행 선거’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여당이 여성 후보를 내면 성폭력 사건 여파가 희석될 수 있고, 국민의힘 전신 정당들의 인사들이 저지른 성 비위도 적지 않다는 부담마저 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은 철저한 검증과 공정한 경선 등으로 가장 도덕적이고 유능한 후보를 찾아 유권자 앞에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처음으로 후보 자격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다.
이낙연 대표는 앞서 지난달 29일 의원총회에서도 "후보자를 내지 않는 것만이 책임 있는 선택이 아니며, 공천으로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책임있는 도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며 "저희 당 잘못으로 시정 공백을 초래하고 보궐선거를 치르게 한 것에 서울·부산시민과 국민 여러분께 거듭 사과드린다"고도 말했다.
법률용어사전을 보면 책임정치란 국가기관이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정치를 뜻한다고 되어있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 책임 또한 국민이 가져야 한다. 대통령을 포함 모든 공직자들이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당연한 것이다.
이들을 선출 임명한 국민은 특히 엄중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책임정치는 국민이 선택한 공당(公黨)과 소속 정치인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보면 견백동이(堅白同異)라는 구절이 있다. 단단하고 흰 돌을 눈으로 볼 때는 흰 것만 알 수 있고, 손으로 만져 볼 때는 단단한 것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단단한 돌과 흰 돌과는 동일한 물건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 같은 궤변(詭辯)을 말할 때 쓰는 사자성어다.
정치권에서 자신들의 입장에서 떠드는 '내로남불'식의 비생산적 '아무말 대잔치'에 딱 어울린다. 오는 보궐선거에서 서울과 부산시장을 선택할 때, 유권자들이 제대로 하면 된다. 책임정치의 의미를 되새기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분발한다면 문제 없다.
·bienns@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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