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턴, 韓 역할 폄훼…文 중재·설득력 돋보일 때도 있어
[더팩트ㅣ청와대=신진환 기자]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을 통해 북미 핵 협상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는 문 대통령의 운전자론 실패를 문제 삼으며 정치 공세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 대통령이 지난 2년여의 북미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나름대로 추진력과 설득력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어 주목된다.
◆ 정의용 통해 북미정상회담 성사시킨 文
볼턴 전 보좌관은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렸던 제1차 북미정상회담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한 인물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아니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18년 3월 정 실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만나자는 김 위원장의 초청장을 건넸고, 트럼프 대통령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를 수용했다"며 "정 실장은 나중에 김정은에게 먼저 그런 초대를 하라고 제안한 것은 자신이었음을 거의 시인했다"고 전했다.
시간을 돌려 그때 당시로 돌아가 보자. 정 실장은 2018년 3월 초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뒤 곧바로 워싱턴으로 향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면담 결과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9일(한국 시각)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얘기를 나누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의 회담 제안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좋다, 만나겠다"고 수락했다.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볼턴 전 보좌관의 주장대로 즉흥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방미 첫날 5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성과를 올리는 순간이었다. 남북과 북미 회담을 이끌어낸 데는 대북·대미 설득에 주력해온 문 대통령의 '중재 전략'이 통했다는 평가가 대체적이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당시 정 실장은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5월까지 김 위원장을 만나겠다고 한 의사를 직접 발표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이었다. 김의겸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이 제안은 워낙 갑작스러워서 정 실장도 문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드릴 경황이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뜻밖의 일이었다.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으로 볼 때 한국 정부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뜻이 깔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주위 참모들에게 "거 봐라. (북한과) 대화하는 게 잘한 것이다"라고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과 참모들의 대북 비핵화 접근 방식에 시각차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볼턴 전 보좌관은 안보보좌관에 지명된 건 정 실장의 방미 이후인 같은 달 22일(현지시간)이다.
◆ 남북미 판문점 회동 빠져라…결국 참석한 文
볼턴 전 보좌관은 회고록에 지난해 6월 30일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 당시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모두 문 대통령의 참여를 원치 않았는데, 문 대통령은 필사적으로 3자 회동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서울에서 비무장지대(DMZ)까지만 배웅하고 북미 정상회담 뒤 오산공군기지에서 다시 만나도 된다고 했지만 문 대통령은 판문점 내 관측 초소까지 같이 가서 결정하자고 했다고 썼다.
당시 문 대통령은 본인 없이 김 위원장이 남한 영토(판문점 남측지역)에 들어오는 것은 적절치 않게 보일 테니 김 위원장을 맞이한 뒤 트럼프 대통령에게 인계하고 떠나겠다고 제안했다는 게 볼턴 전 보좌관의 주장이다. 이 부분이 알려지면서 북미 정상이 문 대통령을 '패싱'하며 중재자 역할에 의문부호가 붙는다는 일각의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교착 국면에 빠진 북미관계와 더불어 남북관계도 좋지 못했다. 남북미 정상이 만나기 사흘 전인 6월 27일 북한은 북미 대화의 당사자는 양측이며 따라서 우리 정부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실제 하노이 회담 이후 북한은 통미봉남(미국과 외교 지향·남한 정부 참여 봉쇄 전략) 자세를 취했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중재 입지를 넓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해 4월과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며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려 했음에도 북한은 호응하지 않았다. 북한과 접촉면을 넓히고 경색된 남북관계를 타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또, 한국 정부도 북미 외곽이 아닌 중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결국, 문 대통령은 북미의 반대에도 남북미 정상 간 만남을 이뤄냈다. 북한과 접촉을 이뤄낸 셈이다. 볼턴의 회고록에 문 대통령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나오지는 않았으나, 자기 뜻을 관철했다는 것은 이미 결과로 증명됐다.
문 대통령은 북미 정상 간 만남에 시선 분산 가능성을 고려해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북미 정상 간 회담 종료 뒤 모든 공을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에게 돌렸다. 중재자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판문점 남북미 정상 회동 당시 볼턴 전 보좌관은 몽골에 있었다.
shincomb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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