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철영 기자] 장금: 홍시입니다.
정 상궁: 어찌 홍시라 생각하느냐?
장금: 예? 저는... 제 입에서는...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 이온데.
정 상궁: 호오! 타고난 미각은 따로 있었구나! 그렇지! 홍시가 들어있어 홍시 맛이 난 걸 생각으로 알아내라 한, 내가 어리석었다.
지난 2003년부터 2004년 3월까지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에서 어린 장금이 고기를 먹고 홍시 맛이 나는 것을 맞춘 유명한 대사다. 어른인 장 상궁은 장금의 타고난 미각을 극찬하면서도 홍시가 들어 있어 홍시 맛이 난 걸 왜 그런지를 알아내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자각한다.
이 대사가 화제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것에 지나친 설명이나 미사여구를 원하는 사회의 단면을 정확히 지적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보여지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어른들의 의혹제기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요즘 제주도 '귤'의 상황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제주도 귤 200톤(t)을 보냈다고 하니 정치권에서 의혹이 불거졌다. "귤만 담았겠느냐"는 것인데, 이런 해석이나 의혹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11일 자신의 SNS에 "군 수송기로 북에 보냈다는 귤 상자 속에 귤만 들어 있다고 믿는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자 김익환 바른미래당 부대변인은 "과거 기득권 부패 정치인들이 사과 박스에 돈을 넣고 은밀한 거래를 했던 것처럼 검은 돈이라도 넣었을 거로 생각하냐. 귤 상자에 사과라도 들어 있다는 말이냐"고 비꽜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도 12일 "사과박스부터 시작해 과일 대신 엉뚱한 물건을 과일상자에 담는 일이야 한국당이 전문일지 모르지만, 괜한 시비 걸기를 중단하라"고 일갈했다.
이렇게 귤의 정체를 두고 정치권이 다투는 모습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다. 새삼 놀랍지는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귤' 대신 '명품'을 건네라는 조언이 나왔다.
보수 논객으로 활동 중인 전여옥 전 새누리당 의원은 같은 날 자신의 SNS에 '귤 갖다 바친다고 김정은이 올까요?'라는 제목의 글을 적었다. 전 전 의원은 "차라리 이설주한테 명품이나 몰래 주던지~, 나 좋아하는 고급 와인이나 보낼 것이지~하며 씩씩거릴지도 모르겠다"라고 비판했다. 김 위원장 부부의 사치를 비난하기 위한 비유로 이해한다.
문 대통령의 귤 선물을 놓고 이런저런 해석은 정치인의 당연한 모습으로 이해한다. 그런데도 남북 화해라는 큰 틀을 놓고 볼 때 '귤' 선물이 이렇게까지 큰 파문이 되어야 할 만큼의 중차대한 일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것도 모자라 '명품'을 선물하라는 비아냥은 듣기 거북하기까지 하다.
귤을 놓고 벌이는 정치인들의 언쟁을 보며 아직도 이런 이념 논리로 접근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국민은 각자의 사고와 각자의 정보로 남북 관계는 물론 세계 정치사에 관해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이런 변화 국면에서 정치권은 아직도 '귤'을 놓고 뒷거래와 같은 의혹를 제기하는 구태를 보이는 것을 보면서 과연 우리 정치에 미래는 있는가라고 자괴감이 드는 국민도 상당하지 않을까.
지난 9월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송이 2톤을 선물로 보냈다. 이번에 북으로 보내지는 '귤'은 김 위원장이 보낸 송이버섯에 대한 답례 성격으로 보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이지 않을까.
고기를 먹었는데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말한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사람에겐 그 어떤 내용을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미 결론을 내놓고 물어보는 이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 이외엔 들리지 않는 법이다. 건조하고 싸늘해진 늦가을 귀갓길에 아이와 함께 먹을 귤 한 봉지 사서 가야겠다. 제주산 귤로 말이다. 귤을 귤로 보지 않는 정치인으로 인해 씁쓸해진 마음이 치유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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