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일본 애니메이션 표절 논란에 "마감 압박 못 이겼다" 사과
[더팩트ㅣ임현경 인턴기자] 정의당의 공식 소개 영상이 일본 애니메이션 표절 논란에 휘말렸다. 당이 해당 사실을 인정·사과하며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노동자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의당이 사유로 든 '마감 압박'과 '무지'는 개운치 못하다는 지적이다.
정의당은 지난달 30일 입장문을 통해 "공식 소개 영상에 사용된 상당수의 장면이 일본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제작한 Z카이와 대성건설 CF 영상의 장면을 트레이싱하거나 구도를 표절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트레이싱(tracing)이란 그림 위에 얇은 종이를 포개놓고 똑같이 베껴 그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정의당에 따르면 문제가 된 영상은 외주 업체를 통하지 않고 당에서 자체 제작했다. 정의당은 표절 경위에 대해 "한 팀원이 평소 신카이 마코토 감독님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마감의 압박에 못 이겨 신카이 마코토 감독님의 작품을 트레이싱했다고 밝혔다"고 설명했다.
또 "팀원의 잘못된 판단이 시초였지만 해당 영상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배포했다는 점에서 정의당의 책임을 깊이 통감한다"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개인과 집단이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가지는 권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창작자의 권리 보전과 이익 향상을 위해 더욱더 노력하겠다"고 했다.
해당 영상은 지난달 27일 정의당 공식 유튜브 채널에 게시된 것으로, '누구나 존중받는 차별 없는 사회', '땀 흘려 일하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 등 정의당이 추구하는 가치를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소개하는 내용이 담겼다. 영상 공개 직후 누리꾼 사이에서 일부 장면이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정의당은 논란을 확인한 즉시 영상을 삭제하고 내부 확인 끝에 사과했지만, 표절에 대한 성토는 그치지 않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가 국내서 두꺼운 지지층을 가진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는 <초속 5센티미터>, <언어의 정원> 등을 만든 영화감독으로, 지난해 <너의 이름은>으로 국내 누적 관객 수 370만 명을 동원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정의당 소개 영상이 일부 트레이싱한 Z카이(크로스로드) 영상은 앞서 <너의 이름은>의 모티프로 알려지며 명성을 얻기도 했다.
◆ 정치권 잇따른 표절 논란…애매한 기준, 모호한 결말
정치권에서의 표절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9대 대선 때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TV 광고가 논란이 됐다. 안 후보 측은 인물을 강조한 여타 후보들과 달리 화면 가득 '역전의 명수', 'IT 전문가' 문구만을 채운 파격적인 영상을 선보였다. 경쾌한 박자의 타악기 연주에 맞춰 글자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형식인데, 미술계에서는 장영혜중공업(장영혜·마크 보주)의 웹아트 작업을 모방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당시 광고 제작자인 이제석 씨는 "화면에 가득한 글자들이 명멸하는 방식은 오래전부터 숱하게 활용되었고, 표절을 거론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하고 보편적인 방식인데 대선이다 보니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라 반박했다.
실제로 애플사의 아이폰 광고를 비롯한 여러 상업광고에서는 빈 화면에 간결한 문구를 띄우며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방식을 사용해왔다. 다만 화면에서 글자가 차지하는 비율이나 글씨체, 움직임이 유난히 장영혜중공업 작품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는 '보편을 정의하는 기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지난 6월 13일 지방선거 유세 기간에는 자유한국당의 선거 노래를 둘러싸고 저작권 논란이 불거졌다. 자유한국당이 사용한 노래 '아기상어'에 대해 '상어가족' 제작사 스마트스터디가 문제를 제기한 것. '상어가족'은 유튜브 조회 수 10억 건을 돌파하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동요 애니메이션이다.
스마트스터디는 지난 4월 "최근 특정 정당에서 '상어가족'을 무단으로 선거송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법적 조치 여부를 검토하고 있으며, 결과에 따라 강경하게 법적 대응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자유한국당은 보도자료를 통해, 상어가족 제작사는 미국 구전 동요 중 조니 온리(Johnny Only) 버전의 곡을 아무런 승인을 받지 않고 사용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상어가족 제작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주장과 함께 조니 온리와 주고받은 메일을 공개했다. 원작자의 허가를 받은 선거 노래와 달리, 제작사의 영상은 기존에 발표된 조니 온리의 곡의 가사와 멜로디를 허가 없이 흉내 냈다며 '역표절'을 제기한 것이다.
결국, 선거 노래에 대한 표절 시비는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한국당 선거 노래는 조니 온리의 'Baby Shark'보다 '상어가족'과 더 흡사했으나, '상어가족' 역시 구전 동요 편곡 방식에서 'Baby Shark'와 유사성을 보였다. 두 곡 모두 저작권이 따로 없는 구전 동요의 2차 창작물이었기 때문에 표절 기준과 판단이 모호했다.
◆ "형법상 문제 되지 않겠지만…" 풀어야 할 과제들
정의당의 경우는 어떨까. 전문가들은 이번 소개 영상 트레이싱 사건의 결말이 애매함만 남긴 채 지나갔던 두 선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한 광고업계 관계자는 "정치권 광고는 기업 히트 광고를 패러디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전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악의가 아닌 재미를 위한 것이기에 기존 광고주들이 문제 삼은 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던 개인의 잘못된 판단 문제라고 생각한다"면서도 "회사 존립 자체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광고회사에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여러 사람이 작업하고 검토한다. 중간 단계에서 필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법적인 문제는 없을까. 정석원 변호사는 "2차적 저작물 작성권 침해 여지가 있다"면서도 "원작자의 고소가 있지 않는 한 형법상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정당 소개 영상이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하거나 원저작물에 큰 손해를 끼쳤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영상을 보고 후원이 들어올 수는 있겠지만, 당을 알리기 위한 행위 자체가 영리 목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부연했다.
정 변호사는 "만약 처벌을 받는다 해도 주체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며 "영상을 만든 사람이 '저 애니메이션이 재밌으니 베껴라' 지시를 받았다면 정상 참작 사유가 되고, 윗사람은 공범이 된다. 그러나 그저 압박을 가한 것으로는 상사에게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또, "유튜브 게시자는 전송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혜창 한국저작권위원회 법제연구팀장은 "원작자의 의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손해배상 청구를 한다 해도 액수가 미미하다고 생각되면 사실상 소 제기가 무의미하다"며 "윤리나 정서적 차원의 문제"라고 봤다.
김 팀장은 "저작물의 성격이나 인용 정도에 따라 저작권 제한 사유를 인정해주는 경우도 있다. 패러디나 풍자에 활용하는 경우가 그렇다"며 "완전히 똑같이 베낀 경우를 제외하면 공익적 이용일 경우 상업적 이용에 비해 넓게 봐준다"고 설명했다.
법정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은 작지만, 이번 표절 사태를 둘러싼 실망의 목소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해명 과정에서 드러난 '지적 재산권 보호 의식 부족'·'직원이 받은 마감 압박'은 평소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애써왔던 정의당의 가치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이에 대해 "소프트웨어를 만들 때도 마감이 임박하면 오픈소스를 따오는 등의 일들이 자주 있다"면서도 "마감 압박이 저작권 침해에 대한 변명이 되기는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사회 전반의 저작권 인식 개선을 위해 교육 프로그램 운영, 관련 내용 교과서 수록 등 다방면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전했다.
imar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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