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ㅣ 이철영 기자] 유력 대선 주자 중 한 명이었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전격적으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유엔 사무총장 10년 임기를 마치고 지난달 12일 귀국하면서 "정치교체를 위해 한 몸 불사르겠다"며 대선 출마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던 반 전 총장이 불과 20일 만에 '무책임'하게 대권 행보를 접은 것이다.
'무책임하다'는 것은 불출마 결심을 측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불출마를 선언한 1일 오전에도 새누리당과 바른정당, 정의당 등을 방문해 "협치·분권을 통해 국민대통합을 해야 한다"며 대선 주자 행보를 이어갔다. 반기문 캠프에서는 취재기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단체 채팅방을 개설하고, 여의도에 200평 규모 사무실까지 차리는 등 본격 출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 전 총장은 '특별한' 이유 없이 수백여 명의 캠프 관계자와 하락세이지만 10%대의 국민 지지를 외면했다. 반기문 캠프 측 관계자는 "반 전 총장의 불출마를 TV를 통해 알았다"며 "캠프 분위기는 한마디로 멘붕 상태"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일언반구 없었다. 오전까지 일정을 소화했고, 여의도에 사무실까지 차린 상태였다.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선거 캠프 종합상황실장으로 거론됐던 권영세 전 의원도 "(1일) 정오에 통화했을 때도 불출마 결심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본선은커녕 예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스스로 물러난 이유는 뭘까. 정치권 안팎에서는 반 전 총장 자신의 자질과 준비 부족, 참모들의 전략적 실패를 꼽았다.
우선 반 전 총장의 불출마 기자회견문을 보면 자질과 준비 부족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불출마 기자회견에서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 각종 가짜 뉴스로 인해서 정치교체 명분은 실종되면서 오히려 저 개인과 가족, 그리고 제가 10년을 봉직했던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기게 됨으로써 결국은 국민들에게 큰 누를 끼치게 됐다"고 불출마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부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이기주의적 태도에 실망했다.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이라며 기성 정치권을 싸잡아 비난했다. 불출마를 '외부의 환경 탓'으로 책임을 돌린 것이다. '꽃가마'를 기대했는데, 현실은 '검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냉혹했다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력 부재도 불출마 요인 중 하나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박연차 23만 달러 수수 의혹' 등 자신을 둘러싼 여러 악재를 돌파할 의지나 정치력이 없었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선 알려지지 않은 '스모킹 건(결정적 단서)'이 반 전 총장의 레이더에 감지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검증을 받은 적이 없는 반 전 총장에 대한 의혹이 본격 대선레이스가 시작되면 더욱 불거질 수 있기 때문에 출마 의사를 접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논란도 잇달았다. 공항철도 인천공항역에서 7500원짜리 표를 사면서 무인 발매기에 1만 원권 2장을 동시에 집어넣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비판이 쏟아졌다. 이후 턱받이, 퇴주잔 논란이 계속되면서 구설에 올랐다. 외교관으로 평생을 바친 그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가슴에 손을 얹지 않고 목례를 한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됐다.
게다가 참모진들의 전략적 실패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대표적인 게 '진보적 보수주의자'이다. 정치평론가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은 2일 <더팩트>에 "반 전 총장은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했는데, 이는 참모들이 스탠스를 잘못 잡은 것"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반 전 총장이 설 자리는 보수다. 진보진영에는 문재인 전 대표, 중도에는 안철수 전 대표가 있다. 그런데 진보적 보수라는 게 어정쩡한 태도다. 이런 태도가 보수진영의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정치판은 지지율을 견디기 힘들다. 반 전 총장은 관료 출신으로 정치판의 '맷집'도 약했다. 게다가 대통령이면 국가비전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반 전 총장은 '돈이 없어서 정당에 들어가야 겠다'며 돈 이야기를 했다. 이런 전략적 실패는 참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지율도 내리막길을 달렸다. 귀국 전까지만 해도 그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앞서며 대선 지지도 선두를 유지했다. 하지만 귀국 후 지지도는 하향세로 돌아섰다.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유순택 여사가 그동안 출마를 강하게 반대해 온 것으로 안다. 그런데 높은 지지율로 아내의 반대를 설득했는데, 최근 지지율이 하락세이고 가족에 대한 검증이 강화되면서 출마를 포기하게 된 것으로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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