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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⑪] 1991년 신민당 창당…'새정치민주연합'의 미래는?

"'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오늘'은 1년 전과 10년 전 제각각 다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연도는 달라도 '오늘'이라는 공간에서 누군가는 빛을 보고, 누군가는 영원한 이별을 고하며,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하죠. <더팩트>은 '그때 그 시절'이라는 코너를 마련해 조금 더 친밀한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려고 합니다. 과거 같은 시간대 한주 간의 이슈를 되짚어 보는 시간, 잠시 쉬어가실까요? <편집자주>

'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 ▲1991년 4월 9일 신민주연합당이 정식 출범했고, ▲2003년 4월 10일 '남쪽 위의 청와대'가 기자단에 첫 공개됐으며  ▲1981년 4월 12일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했습니다./사진=서울신문 제공, 그래픽=오경희 기자
'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 ▲1991년 4월 9일 신민주연합당이 정식 출범했고, ▲2003년 4월 10일 '남쪽 위의 청와대'가 기자단에 첫 공개됐으며 ▲1981년 4월 12일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했습니다./사진=서울신문 제공, 그래픽=오경희 기자

[오경희 기자] '새정치'를 내걸고 힘차게 닻을 올린 '새정치민주연합'이 요즘 '기초선거 공천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6·4 지방선거에서 기초선거 무공천을 약속했지만 현실 정치 앞에 10일 그 뜻을 거뒀기 때문입니다. 전날 당원·국민 투표 결과 '당심'과 '민심'도 '공천을 해야 한다'는 쪽에 조금 더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무공천' 지지층 또한 못지 않았습니다.

30여년전, 새정치민주연합의 탄생과 사뭇 닮은 정당이 있습니다.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과 신민당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에서 창당의 명분을 찾고, 주도세력이 집권을 강력히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신민당은 5공 독재에 맞서 창당된 신한민주당은 1987년 갈라섰습니다. 당권(대권)투쟁, 노선 갈등 등이 원인입니다. 이는 통합 신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앞으로 고민해야 할 하나의 길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1991년 4월 9일 신민주연합당 정식 출범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신민당 대통령 후보지명전에서 2차까지 가는 투표 끝에 40대기수론을 선창한 김영삼 후보에 역전승을 거두며 후보로 지명된 김대중 후보가 두 팔을 치켜들고 답례하고 있습니다. /서울신문 제공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신민당 대통령 후보지명전에서 2차까지 가는 투표 끝에 40대기수론을 선창한 김영삼 후보에 역전승을 거두며 후보로 지명된 김대중 후보가 두 팔을 치켜들고 답례하고 있습니다. /서울신문 제공

평민당과 재야의 신민주연합당이 이날 서울 삼성동 한국 종합 전시장에서 통합 출범 전당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습니다. 이로써 지난 1987년 11월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위해 창당됐던 평화민주당은 3년 5개월 만에 간판을 내리고, 신민당이 원내의석 69석의 제1야당이 됐습니다.

신민당이라는 당명은 이날로 세 번째 사용됐습니다. 지난 1967년 신한당과 민중당이 합쳐 1980년 5월 17일까지 이어진 신민당, 1985년 5공의 12대 총선을 앞두고 탄생한 제2의 신민당, 그리고 이날 제3의 신민당이 출범한 것입니다.

우리 헌정사에서 수많은 정당이 명멸했지만 신한민주당(신민당)만큼 단기간에 성공한 당은 없습니다. 쿠데타도 아니고 선거로 창당 25일 만에 제2당이 되었으니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신민당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풀려난 야권 인사들이 주축이됐습니다.

신민당의 역사는 길지 않았습니다. 1987년 김영삼(YS)-김대중(DJ) 대선 후보가 분열하면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으로 갈라섰습니다.이후 DJ의 정계복귀 이후 새정치국민회의가 탄생했고, 5년 뒤 새정치국민회의가 확대 개편돼 2000년 새천년민주당으로 새 간판을 달았습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열린우리당으로 재편됐고, 2007년 중도개혁세력을 표방한 열린우리당 탈당파를 중심으로 대통합민주신당-2012년 민주통합당-2013년 민주당으로 당 간판을 바꿔 달았습니다.

◆ 2003년 4월 10일 청남대 기자단에 내부 첫 공개

역대 대통령들은 '남쪽의 청와대'라 불리는 청남대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습습니다. 청남대에 세운 역대 대통령 동상. 왼쪽부터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서울신문 제공
역대 대통령들은 '남쪽의 청와대'라 불리는 청남대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습습니다. 청남대에 세운 역대 대통령 동상. 왼쪽부터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서울신문 제공

이날 대통령 여름 휴가 별장 청남대가 공개됐습니다. 충북 청원에 자리 잡은 연건평 800평 규모의 청남대 건물이나 산책로 주변에는 백송·주목·감나무·살구나무·은방울꽃·붓꽃·애기백일홍·꿀풀·취나물 등 100여종의 우리나라 토종나무와 야생화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지지크는 입구의 육중한 철문과 겹겹이 싸인 철조망은 청남대가 국가 중요 보안시설이라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83년 완공된 청남대는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소유권을 충북으로 이양하며 민간에게 개방되기 전까지 많은 대통령들의 사랑을 받은 별장이었습니다. 전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남대를 찾는 단골손님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5년 내내 이곳으로 여름휴가를 갔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청남대를 찾아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경호실 직원들과 어울려 축구를 즐기기도 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골프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조깅을 하며 휴가를 보냈습니다.

'남쪽의 청와대'로 불리는 청남대는 역대 대통령들이 국정운영의 중대한 고비 때마다 굵직한 결단을 내렸던 장소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청남대에서 '금융실명제 실시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국정운영 철학을 정리해 연설원고를 직접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 1981년 4월 12일 미국 남북전쟁 발발

1981년 링컨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쯤 뒤인 4월 12일 남북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링컨'의 한 장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 폐지를 법제화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서울신문 제공
1981년 링컨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쯤 뒤인 4월 12일 남북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링컨'의 한 장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 폐지를 법제화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서울신문 제공

남북전쟁의 첫 총성은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쯤 뒤인 1981년 4월 12일 사우스 캘롤라이나주에 있는 포트 섬터 항구의 연방 초소에서 들렸습니다.

남군정부는 지금까지 연방에서 파견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남군에 소속된 주로부터 철수를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력행사에 들어간 것입니다. 주둔하던 연방군대는 반격 한번 못하고 백기를 들었습니다.

이날 희생된 것은 단지 말 한필이었으나 5년간의 남북전쟁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링컨은 민병대를 소집한 뒤 조속한 진압을 지시했고, 두 달 만에 맥도웰 장군이 이끄는 북군이 남군의 수도 리치먼드를 향해 출정해 본격적인 남북전쟁이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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