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CT

검색
정치
[대선주자 입체분석] ①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김두관의 '오뚝이' 인생

2013년 새 시대를 열게 될 대통령은 누가 될까. 오는 12월 19일 치러지는 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야 대권 잠룡들의 출마 선언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동시에 국민들은 이들의 면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궁금증을 나타내고 있다. 이번 선택이 향후 5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더팩트>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여야 유력 대선 후보들에 대한 '주변'을 재조명하는 '특별기획-대선주자 릴레이 입체분석'을 시리즈로 다룬다. 여덟 번 째 주자는 민주통합당 소속 김두관(54) 전 경남도지사다. <편집자주>


[ 정현정 인턴기자]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만화 '개구리소년 왕눈이'의 주제가는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의 상황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노래다. 김 전 지사는 2002년부터 민선 3·4기 경남도지사 낙선,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 17·18대 총선 낙선, 2005년 열린우리당(현 민주통합당) 의장선거 낙선,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현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컷오프 탈락을 거쳐 2010년 민선 5기 경남도지사로 선출됐다. 그야말로 '7전8기' 인생을 걷고 있는 셈이다. 김 전 지사의 '오뚝이'같은 54년 인생을 돌아봤다.

◆ 가난도 막지 못한 '학구열'





 1958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는 어린 시절 운동화를 신고 바닷가를 달리는 게 소원일 정도로 가난했다. 돈이 없어 4년제 대학교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2년 간 마늘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 사진출처 =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공식 블로그
1958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는 어린 시절 운동화를 신고 바닷가를 달리는 게 소원일 정도로 가난했다. 돈이 없어 4년제 대학교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2년 간 마늘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 사진출처 =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공식 블로그

김 전 지사는 1958년 경남 남해에서 가난한 농부의 5남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뼛속부터 서민"인 그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운동화를 신고 바닷가를 달리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다. 11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 살림이 더욱 기울었다.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게 한 두 개가 아니다. 도마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120명 중 돈이 없어 부산으로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세 명 중 한 명에 포함됐다. 또 남해중학교를 다닐 때는 보충비 500원이 없어 수시로 교단에 불려가기도 했다.

결국 대학 진학의 꿈도 접어야 했다. 국민대학교 어문계열에 합격했지만 가난한 형편에 입학금 28만3000원은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대학 진학 대신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남해에서 작은 형과 마늘 농사를 짓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농사를 지어도 돈은커녕 빚만 쌓여갔다. 나날이 늘어가는 빚은 생각을 바꾸게 했다. 공부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이후 2년간의 '주경야독' 끝에 1979년 전문대 중 유일하게 행정학과가 있던 경북영주전문대에 진학했다. 2년 후에는 동아대 정치외교학과에 편입해 공부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 유신으로 깨달은 '풀뿌리 민주주의'





 대학에 입학한 후 김 전 지사는 서울에 있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설 민족학교를 다니며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투쟁 중 옥살이를 했고, 그 때 깨달은 게 풀뿌리 민주주의였다. 고향인 남해로 내려가 남해농민회 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이장을 거쳐 군수에 당선돼 '별난 군수'로 이름을 날렸다.
대학에 입학한 후 김 전 지사는 서울에 있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설 민족학교를 다니며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투쟁 중 옥살이를 했고, 그 때 깨달은 게 풀뿌리 민주주의였다. 고향인 남해로 내려가 남해농민회 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이장을 거쳐 군수에 당선돼 '별난 군수'로 이름을 날렸다.

1983년 대학교 4학년 때 입대했다. 강제 징집된 동료들과 어울리며 사회 모순에 눈을 떴다. 결국 제대 후에는 1986년부터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이하 민통련)의 부설 민족학교를 다니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이 때 고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덕씨를 소개받아 이소선 여사의 사위가 될 뻔 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민통련의 간사로 활동하던 당시 개헌추진본부 충북지구 결성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다. 3개월간의 옥살이를 하는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답은 '풀뿌리 민주주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 전 지사는 석방된 후 남해로 돌아와 '남해농민회'를 만들고 농민 운동에 앞장섰다. 농민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1988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의 이장으로 뽑혀 지역 사회에 헌신했다. 1995년에는 여당의 텃밭이던 남해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36세의 나이로 남해군수에 당선, 최연소 기초자치단체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김 전 지사는 '독일인 마을'과 현재 여러 나라의 국가대표의 전지훈련장이 된 스포츠파크를 만드는 업적을 이룩했다. 또 '열린 행정'을 보여주고자 군수실 벽 한쪽을 유리로 만들고, 남해대교에서 번지점프를 직접 하는 등 '별난 군수'로 이름을 날렸다. 군수시절 스토리는 1999년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도 소개돼 팬클럽 '두드림'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노무현과 만남 후… '리틀 노무현'의 7전8기





 김 전 지사는 여러번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 도전 끝에 2010년 경남도지사에 당선됐다. 2003년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름으로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기도 했다.
김 전 지사는 여러번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 도전 끝에 2010년 경남도지사에 당선됐다. 2003년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름으로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기도 했다.

경남에서 청렴하고 개혁적인 단체장 1위를 기록한 김 전 지사는 1998년 남해군수 재선에 성공했다. 2002년에는 무소속으로 경남도지사 도전을 결심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권유로 새천년민주당(현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평소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지사를 "모범적인 지방행정가"라고 평가했다. 김 전 지사는 자신을 믿어주던 노 전 대통령의 뜻대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경남도지사에 도전했으나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슬픔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1년 후 16대 대통령에 당선된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지사를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장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년 만에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해임 요구로 전격 사퇴를 발표했다. 실의에 빠질 만도 하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경남 남해군·하동군 지역에 출마했고, 2006년 경남도지사에 재도전했다. 모두 고배를 마셨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가난에서 배우고 현장에서 뛰면서 느꼈던 인내와 끈기, 뚝심을 모두 발휘해 2010년 경남도지사 선거에 세 번째로 도전했다. 삼수 끝에 승리한 김 전 지사에 대해 정가에선 '지역주의를 무너뜨리는 큰 성과를 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김 전 지사는 약 2년간의 도정생활을 접고 오는 12월 대선에 도전장을 냈다. 경남도지사직을 어렵게 얻은 만큼 내려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 전 지사가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는 "평등국가"를 향한 꿈이 컸기 때문이다. 지사직 사퇴라는 결정은 그의 '오뚝이' 인생에 또 어떤 변화를 줄지 관심이 쏠린다.

<사진 =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공식 블로그>

littlejhj@tf.co.kr

[더팩트 정치팀 ptoday@tf.co.kr]

폴리피플들의 즐거운 정치뉴스 'P-TODAY'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인기기사
회사소개 로그인 PC화면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