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새 시대를 열게 될 대통령은 누가 될까. 오는 12월 19일 치러지는 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야 대권 잠룡들의 출마 선언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동시에 국민들은 이들의 면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궁금증을 나타내고 있다. 이번 선택이 향후 5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더팩트>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여야 유력 대선 후보들에 대한 '주변'을 재조명하는 '특별기획-대선주자 릴레이 입체분석'을 시리즈로 다룬다. 다섯 번째 주자는 새누리당 소속 김문수 경기도지사다. <편집자주>
[손화신 인턴기자]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주말이면 택시운전대를 잡는다. 지난 2009년 1월 경기도 택시면허를 취득한 뒤 '1일 택시기사'로서 지난 6월까지 경기도에서 33차례, 서울에서 3차례에 걸쳐 민생체험에 나섰다. 길 위를 달리는 택시가 코너를 돌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맞이하듯, 김 지사의 인생길에도 여러 코너들이 있었다. 젊은 날 노동 운동에 투신해 산전수전을 겪었고, 1990년 정치계에 입문한 뒤에는 3선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지금의 새누리당 대선주자로 나서기까지 그의 인생길의 풍경을 바꾼 '다섯 코너'를 살펴본다.
◆ 부자와 빈민의 괴리를 괴로워한 '청년 김문수'

김 지사는 1951년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의 방이 20칸인 경주 김씨 종갓집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판잣집으로 쫓겨나 '밥 세 끼를 먹어보는 게 소원'일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종갓집에서 옛날식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공부를 잘했다.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1969년 경북고등학교 3학년 때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참가하며 처음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김 지사는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 지사는 운동권 동아리인 '후진국 사회연구회'에 가입했다. 미래가 보장된 길을 놔두고 반일 시위 등 시국 사건과 관련한 학생 데모에 적극 가담하며 학생운동에 또다시 투신했다. 이 시기 김 지사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빈민촌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서울 친척집에서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상당히 부유했던 친척집에서의 생활은 자신의 가난한 생활과 극명히 대조됐다. 때문에 빈부격차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라났고, 후일 그의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전태일 분신자살에 노동운동 투신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은 김 지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대학 2학년 때인 1971년에 서울 구로공단의 한 드레스 미싱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게 된다. 이때의 체험은 김 지사가 한국노동계의 현실에 눈을 뜨게 했고, 이후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결국 김 지사는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가담한 게 문제가 됐다. 당시 그는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후 김 지사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청계천 피복공장 재단보조공으로 일했고, 전국금속노조 한일 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지내며 노동운동에서 이름을 날렸다.
1985년에는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2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1986년 '5·3 인천사태'로 체포당한 사건도 있었다. 김 지사가 송파구 보안사 분실에서 생사를 오가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하면서도 운동권 동지였던 심상정 통합진보당 원내대표의 행방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은 꽤 알려진 일화다. 김 지사와 심 원내대표, 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는 서울대 운동권 선후배 사이로 30년의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다.
◆ 김영삼 러브콜에 민자당 입당 '우클릭' 전향
노동 운동에 힘을 쏟던 그에게 1989년 동독의 붕괴와 구소련의 붕괴는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1990년 전후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보며 그는 '좌파적 노동관'을 버리고 온건론으로 노선을 선회했다. 더불어 성장에 자원을 집중하되 복지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결국 1990년 11월 그는 장기표 전태일재단 이사장,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등과 함께 진보적 혁신 정당인 민중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민중당 창당 후 노동위원장으로 선임돼 활동하던 김 지사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며 새로운 코너를 돈다. 하지만 코너 끝에는 '총선 참패'라는 뼈아픈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 지사는 패배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도약을 향해 나아갔다. 1994년 3월 김영삼 정권의 러브콜을 받아 집권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좌파적 노동운동을 하던 그가 보수당원으로 '깜짝' 변신을 한 셈이다.
입당 이후 김 지사는 같은 해 노동부 행정규제완화위원회 위원과 노동인권회관 이사에 선출됐고, 1996년에는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부천시 소사구에서 당선됐다. 승승장구의 길을 달린 것이다. 이후 그는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뒤에도 계속 활동했고, 1996년부터 1년간 신한국당 대표최고의원 특별보좌관을 수행하기도 했다.
◆ 국회의원에서 경기도지사로 '변신'

김 지사는 인정받는 3선 국회의원이었다. 15~17대 의원을 연임하는 동안 노동 분야와 환경, 수도권 교통과 아동보육 분야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쳤다. 정권 부패 척결과 북한 인권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2005년에는 국정감사 최우수 의원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국회출입기자단으로부터 '약속 잘 지키는 국회의원' 1위와 '일 잘 하는 국회의원'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국회의원 김문수'는 2006년에 그의 인생길에서 가장 큰 코너를 돌게 된다. '경기도지사 김문수'로 새롭게 도약한 것이다. 도지사로서 그는 2009년 한국메니페스토운동본부에서 평가하는 공약 이행도 평가에서 1위를 차지, 2010년에는 재선에 성공하며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 2012년 대선주자로 '새로운 도전'

김 지사는 이제 막 인생의 다섯 번 째 코너를 돌았다. 2012년 대권에 나선 것이다. 지난 4월22일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그는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리더십 등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했으나 대통령 선거에선 이대로 가면 진다"며 박 전 위원장의 리더십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어 "수도권과 젊은 층에 호소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김문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경제양극화 해결, 일자리 창출, 민생의 문제를 풀고 미래성장 산업을 키울 것"이라면서 "분열된 대한민국을 통합해 부정을 긍정으로, 좌절을 희망으로 만들고 우리 경제ㆍ사회ㆍ문화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정치선진화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강조했다. '택시지사 김문수'가 2012년 대권을 향해 시원하게 질주할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출처=김문수 경기도지사 공식 블로그, 팬카페 '문수사랑', 서울신문>
[더팩트 정치팀 ptoda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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