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94 신바람 LG' 이광환 감독 "야구는 기다림의 스포츠" ①편 다시보기
[유성현 기자] 흔히들 이광환 감독이 이끌던 과거 LG 트윈스의 전성기를 '신바람 야구'라 추억한다. 선수들은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넘치는 자신감으로 녹색 다이아몬드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볐다. LG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팀 컬러는 당시 프로야구계 신선한 충격으로 불리며 오며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 감독은 LG의 신바람을 이루기까지는 엄청난 노력과 함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이 뒷받침 돼 있었다고 강조한다. 선수들의 자율성을 보장했다기 보다는 프로 정신에 기반한 책임을 중요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LG가 이끌기 시작한 작은 바람은 태풍이 되어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집어 삼켰다.

◆ 유학으로 깨달은 선진 야구 도입, 노력과 뚝심으로 이루다
이광환 감독은 프로야구 초창기 당시 흔치 않았던 '국외 유학파' 출신이다. 일본야구 뿐 아니라 미국야구까지 차례로 공부했다. 낯선 땅에서는 누구도 '선진 야구는 이런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는 경기 관련 기록들을 매일 손으로 직접 써가며 선진 야구 시스템을 몸으로 익혔다. 이 감독은 25년 전 일본과 미국의 야구 현장을 누비며 손수 기록했던 문서들을 <더팩트>에 특별히 공개했다.
"다른 것은 책에서나마 배울 수가 있었어. 근데 풀 시즌을 치러내는 미국의 투수 운용만큼은 직접 지켜보지 않고서야 정리가 안되는거라. 그래서 이렇게 매일 손으로 적기 시작한거야. 적어보니 딱 답이 나왔어. 전 구단을 다 분석하면서 투수 로테이션에 대한 개념도 익히고 분업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했던 거지. 긴 시즌을 치르는 리그에서는 체계적인 투수 운용이야말로 승리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 생각했어."
이 감독은 야구 유학을 마치고 만 41세의 젊은 나이였던 1989년 OB 감독에 취임하면서 한국프로야구에 선진 야구를 뿌리내릴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자율 야구와 투수 분업화는 팀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면서 그는 2년 만에 지휘봉을 놓게 된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이 감독은 1992년 LG를 맡아 야구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22년 전이니까 그때만 해도 달걀로 바위치기였어. 당시만 하더라도 투수로 보면 오늘 던지고 내일도 또 던지고, 보직 구분이 없던 게 당연했으니까. 몇몇 선수들은 '저 이틀 쉬면 안될 것 같습니다'라면서 적응을 못했어.(웃음) 그래서 OB때는 실패했었지. 이상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LG로 와서는 아예 마음먹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어. 서서히 선수들도 적응하고 자신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 다음부터 차츰 성과를 낼 수 있었지."

◆ 1994년 LG 신바람 야구, 초대형 태풍되어 우승 삼키다
1994년 LG는 태평양 돌핀스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다. 1차전부터 양 팀은 11회까지 가는 연장 접전을 펼쳤다. 당시 태평양 선발 김홍집은 연장 11회까지 무려 140구를 던지며 LG 강타선을 1실점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1-1 동점이던 연장 11회 말, 타석에는 대타 김선진이 들어섰다. 김선진은 김홍집의 초구를 강타, 좌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솔로 홈런을 터뜨려 4시간 사투의 종지부를 찍었다.
"1993년 플레이오프 때는 김선진의 본헤드 플레이 하나 때문에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했었지. 그때는 정말 그 플레이 하나가 얼마나 미웠었는지.(웃음) 그래도 야구라는 게 인내심이 필요하니 그렇게 트레이드 없이 1년을 더 함께 했지. 그런데 다음해 한국시리즈에서 보란 듯이 홈런을 때릴 줄은 몰랐던 거야. 미운 오리가 단숨에 백조가 된 거 아냐. 지옥과 천당을 오간 셈이지.(웃음)"
사실 김선진은 1993년 삼성과 치른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3-4로 뒤지던 경기 막판 주루 미스를 범하며 동점 기회를 날렸던 '미운 오리'였다. LG은 그 실수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이 감독은 다음 시즌에도 김선진을 안고 갔고, 결국 김선진은 다음 시즌 한국시리즈에서 과거 실수를 만회하는 끝내기 홈런을 선사했다. 1차전 승리로 기세를 올린 LG는 분위기를 몰아 4전 전승으로 압도적인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때는 이래저래 궁합이 잘 맞았어. 투수진은 전 구단 중 8개 구단 중 최고령이었는데 역할 분담을 한 대로 제 역할을 잘 해줬어. 10승 투수가 4명도 나왔고. 특히 고참 선수들이 어린 선수들을 잘 이끌어 주면서 신구 조화가 잘 됐던 것 같아. 한국시리즈에서는 나도 역시 야구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걸 또 한번 느꼈어. 이런게 바로 야구지.(웃음)"

◆ 늘 한 발 앞섰던 이광환의 야구 인생 '여전히 진행 중'
최근 한국프로야구 초창기를 이끌던 두 전설인 장효조와 최동원이 잇따라 세상과 작별을 고하면서 많은 팬들은 그들의 업적을 돌아보려는 움직임을 이어갔다.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기 쉬운 야구계 전설들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명예의 전당과 야구 박물관 건립도 최근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프로야구 출범 30주년을 맞아서야 서서히 한국 야구는 스스로의 전통을 세우려는 노력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감독은 과거부터 야구계 발전과 유지를 위해서는 '전통의 확립'이 절실하다고 봤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감독의 주장을 쓸데 없는 것이라 여겼다. 결국 이 감독은 주변의 좋지 않은 시선에도 사비를 털어 제주도에 야구 박물관을 세웠다. '추억 새기기' 열풍이 불어닥친 지금으로부터 무려 16년 전인 1995년 당시의 이야기다.
야구인 이광환의 시선은 항상 더 넓고 멀리 향했다. 그래서 행동 또한 남들보다 늘 한 걸음 앞섰다. 그만큼 사람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이 감독은 인내심과 노력으로 묵묵히 야구인의 인생을 걸었다. 그는 지금도 60대 고령의 나이에 유소년·여자 야구 활성화, 티볼의 보급, 전문 야구 지도자 양성 등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매번 도전의 연속이었던 고된 야구 인생에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나도 물론 힘들지. 이제 좀 쉬고 싶기도 한데 팔자가 그런 걸 어떡해.(웃음) 무엇이든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거라고 믿어. 야구인으로서 최종 목표?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이렇게 일하다 가는거지 뭐.(웃음)"
<글 = 유성현 기자, 사진 = 배정한 기자>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yshalex@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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