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새롬 기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구 현대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지난해 10월 최저임금 등 비용상 문제를 들어 직접고용 형태였던 경비원 운영방식을 간접고용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41개동 소속 경비원 96명 전원은 지난 2월 1일 해고통보서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고용 방식을 직접고용에서 간접고용으로 전환하려는 아파트의 결정을 중단해달라고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비원들은 아파트 입주민이 아니기 때문에 대표회의의 결정에 제동을 걸 자격이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몇 년 전부터 대표회의는 경비원들의 임금 상승률을 낮추기 위해 24시간의 근무 시간 중에 6시간의 휴게시간을 포함했다. 지난 2017년 3월, 시간 공제되는 6시간에 대한 체불임금을 달라고 23명의 경비원들이 노동부 강남지부에 진정을 넣은 것이 발단이 됐다.
새해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이곳을 찾아 경비원들을 면담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지만 '최저임금 인상'에 얽힌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산됐다. 입주민 1200여세대의 서명을 받은 경비원들은 입주민 대표 두 명을 내세워 2월 14일 다시 가처분소송을 낼 예정이었지만 결국 이마저 취소됐다. 이미 용역업체로 넘어간 마당에 경비원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어졌다.
지난 1월 31일 대표회의는 '경비원 및 관리원 운영 안내' 공고문을 통해 24시간 격일 근무하는 경비원(순찰조원) 28명을 두고, 3조 3교대 근무하는 관리원을 70명 간접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공고문에 따르면 관리원은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3개조로 3교대(2일 근무 1일 휴무) 근무한다. 관리원이 하는 역할은 주차 관리와 택배대리보관, 낙엽청소, 재활용 분리, 청소, 제설 작업 등이다. 용역전환 조건으로 전원 고용보장, 기존 급여(월229만원) 보장, 70세로 정년 연장, 임의해고 방지를 위한 고용 보장장치 마련, 정리수당 지급 등을 약속했다.
경비원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조건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 대다수이다. 고용승계 1년은 보장됐다지만, 직접고용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임금이 삭감되거나 해고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먹고사는 데 지장이 생기니 경비원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용역 전환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20여명은 퇴직을 결정했다.
그동안 96명의 경비원들은 41개동 3000여 세대가 거주하는 이 아파트에서 A, B조로 나누어 24시간 격일 근무를 해왔다. (초기 107명에서 퇴사하고 현재 남아있는 인원이 96명이다.) 이 아파트 경비원들의 주된 업무는 주차 관리다. 하루 2/3의 업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은 지 오래돼 지하주차장이 없는 이 아파트는 주차 공간이 부족한데 비해 차들이 많아 주민들이 겹겹이 세워놓기가 일쑤다. 이런 주민들의 차를 정리하는 것 역시 경비원의 몫이다. 이 아파트 대부분의 경비 초소에는 주민들의 차키가 보관돼 있다. 주민들의 출퇴근 시간이 주차 업무가 가장 바쁘다. 주민들의 편의에 맞춰 남들보다 이른 점심과 저녁을 먹는다. 휴게시간은 점심(10:30-11:30), 저녁(16:30-17:30) 식사 2시간과 야간 (24:00-04:00) 4시간, 총 6시간이 주어지지만 이것 또한 유명무실하다. 기자가 몇몇 경비원들과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주민들의 요청에 수시로 차를 움직여야 했다.
강남의 대표적 부촌인 이 아파트에는 외제차들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4년 째 근무 중인 한 경비원은 처음 이 곳에 와서 많은 고충을 겪었다. 외제차들의 브랜드와 모델에 따라 시동 거는 법이 달라 한참을 헤맸다. 사이드미러를 못 펴서 고개를 내밀고 주차를 한 적도 있다고 푸념했다. 대다수 경비원들이 주차과정에서 사고 경험이 있었다. 좋은 주민을 만나면 주민이 직접 보험처리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본인 부담으로 해결해야 했다.
경비원들은 2평이 채 되지 않는 컨테이너 초소에서 24시간을 지낸다. 관리사무소에서 지급한 전기스토브로 언 손과 발을 녹인다. 이례적인 한파를 견디기엔 다소 부족해 보이지만 그래도 겨울이 나은 편이다. 한 경비원은 지난 여름, 폭염에 에어컨이 없는 이 초소에서 “내 평생 처음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며 지하실과 차로 피신했던 웃지 못 할 이야기를 털어놨다.
화장실도 열악했다. 초소에 화장실이 없어 인근 4-5개 동 경비원이 한 개동 아파트 지하실에 마련된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입주민 차량 운전기사들도 화장실을 공유하기 때문에 줄을 서 기다리는 일도 다반사다. 기자가 직접 화장실을 들어갔다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깜깜한 지하실의 분위기도 무서웠지만, 낡고 오래된 변기는 더욱 공포스러웠다. 그나마 이렇게 화장실이라도 있는 동은 나은 편이다. 71동과 72동은 화장실이 없어 경비원들의 고충이 더 심하다고 했다.
경비원들의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일부 주민들은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현대아파트 주민인 12년 전 중학생'이라고 밝힌 한 주민은 지난해 11월 용역 전환을 반대하는 내용의 게시문을 아파트에 붙였다. 이 주민은 “경비원들이 하루 10시간 근무한다고 할 때 경비원 1인당 급여 인상분은 하루 1만 400원, 월급으로 약 30만원이다. 이 금액을 한 개 동 세대수로 나누면 3570원이다. 그 정도 부담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12년 전 중학생인 자신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켜주던 경비원 아저씨들이 지금 우리 아파트의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지켜주길 바란다”고 다른 입주민들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경비원들은 몇몇 동대표와 주민으로 인해 입주자대표회의가 좌지우지된다고 말한다. 경비원 강 모 씨는 "민주적으로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몇십억짜리 아파트에서, 주민도 많은 이 아파트에서 몇몇 사람이 이렇게 그냥 결정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다. 의사결정이 이렇게 쉽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아파트가 얼마나 유명한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지" 라며 안타까워 했다.
17년간 이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한 박 씨가 9일 오후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초소를 나섰다. 그는 "그동안 갖은 고초에도 내 일터라는 생각에 애정을 가지고 근무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떠나게 돼 착잡한 마음이 크다"며 착잡한 심경을 나타냈다. 당분간 실업 급여를 받으며 다른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다. 10여년 간 근무한 김 모 씨 역시 주민들과의 좋은 관계에도 불명예스럽게 떠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전했다.
갑작스런 해고와 용역 전환에 떠난 자도 남은 자도 씁쓸하기만 하다. 끝내 경비원들에게 "함께 가자"며 손 내민 사람은 없었다. "있는 사람이 더하다" 싶은 민낯만 남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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