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양호 회장, '수송보국' 일생 바친 항공업계 '거목' 평가 줄이어
[더팩트 | 서재근 기자] 지난 200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상임위원회 회의를 마친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자동차를 타고 스위스 체르마트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촬영한 사진이 있다.
갑작스러운 고인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바라본 탓일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만들어낸 겨울 풍경이 흑백사진에 담겨 유독 쓸쓸하게 느껴진다. 지난 8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별세했다. 글로벌 항공사로 자리매김한 대한항공의 수장으로 45년이라는 세월 동안 우리나라 항공운송업계 선봉장을 자처했던 기업인의 마지막은 '씁쓸하다'는 표현조차 부족할 만큼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지난해 3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진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이 수면에 오른 이후 사정 당국이 고인의 자택과 회사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한 횟수는 18회, 조 씨 일가를 포토라인에 세운 횟수는 14회에 달한다. 한 달에 한 번꼴이다.
한진 일가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는 사법·사정기관의 수만 하더라도 경찰과 검찰, 관세청, 법무부, 국토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교육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농림축산검역본부 등 무려 11곳이다.
물론 잘못을 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러야 함이 마땅하다. 고인의 부인과 자녀들이 보여준 '갑질 행태'는 분명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고, 이들의 행동이 어떤 변명으로도 당위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조양호 회장 역시 지난 2014년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기자회견 당시 "아버지로서 부끄럽다"며 전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가.
아쉬운 부분은 '갑질 논란' 이후 고인에 대한 사정 당국의 수사 과정이다. 지난해 5월 조 회장의 밀수 및 외화 밀반출 혐의 등에 관해 관세청이 고인의 평창동 자택을 압수수색했을 당시 이른 바 '비밀의 방' 의혹이 일파만파 언론을 통해 확산했지만, 조사를 마친 관세청 직원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상자 두 개가 전부였다. 같은 해 대한항공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시행한 압수수색 때는 관세청이 해당 업체가 창고에서 보관해 온 2.5t 트럭 한 대 물량의 물품을 압수했지만, 유죄를 확정할 만한 단서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 회장이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질 때까지 재계 안팎에서 '무죄추정의 원칙',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른 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 역시 사정 당국의 보여준 수사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조 회장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이후 각종 인터넷 포털 검색어에 '숙환(宿患)'이라는 단어가 상위에 올랐다. 말 그대로 '오래된 병'이란 뜻이다. 지난해 7월 조 회장이 영장실질심사 당시 폐 질환으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진단서를 제출했을 때만 하더라도 다수 관련 기사 댓글에는 이를 비난하는 누리꾼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고인이 별세한 이후에야 그가 앓았던 지병과 건강 상태가 재조명된 셈이다.
'수송보국'에 일생을 바친 항공업계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조 회장의 타계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과 IATA, 글로벌 항공사 최고경영자(CEO)들이 잇따라 기업가로서 고인의 역할과 업적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담아 애도를 표했다. '부끄러운 아버지'이자 '부족한 남편'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반백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스포츠 위상 제고에 이바지해 온 기업인이 남긴 발자취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한 변호사는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최근 사정 당국의 과도한 수사방식에 관해 지적하면서 "전직 검사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럽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해당 글이 정치적 목적으로 쓰인 것인지, 자조 섞인 한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항공물류 산업 발전에 수십여년 동안 공헌해 온 기업가의 업적과 공로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송두리째 지워지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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