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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14> '역도 영웅' 전병관 "부모님께 바친 올림픽 金" ②편





▲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역도 금메달리스트 전병관
▲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역도 금메달리스트 전병관

▶[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14> '역도 영웅' 전병관 "장미란, 처음 보자마자…" ①편

"'내가 해냈구나. 관중석을 찾으신 부모님께 떳떳하고, 기쁨을 드렸구나'라고 생각했죠."

전병관은 서울올림픽에서 꿈에 그리던 올림픽 첫 메달(은메달)을 땄다. 그날 밤 기쁨에 겨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튿날에는 아쉬움에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용상 3차 시기에서 157.5kg을 들어 올리면 세브달린 마리노프(불가리아)와 합계 270kg으로 같아 체중이 적게 나가는 전병관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목표가 동메달이었는데 은메달을 따니까 긴장이 풀렸죠. 한번만 더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면 금메달이 가능했었는데…'왜 쉽게 포기했을까'하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 전병관(42) 한국 역도 주니어 대표팀 감독/ 사진 - 배정한 기자
▲ 전병관(42) 한국 역도 주니어 대표팀 감독/ 사진 - 배정한 기자

◆ '올림픽 金' 향한 진군…세계선수권 100년 만에 '첫 金'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한 서울올림픽. 그 아쉬움은 전병관에겐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됐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목표. "서울올림픽 후 메달리스트들이 청와대에 초청을 받았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금메달과 은메달의 차이를 확연히 느꼈죠. 옆에 앉은 타 종목 선배들의 목에 걸려있는 금메달이 예뻐 보였어요. '꼭 4년 후에 금메달을 따자'고 다짐했죠.(웃음)"

'금빛 유혹'이 큰 효과를 발휘했을까. 전병관은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989년 세계주니어역도선수권대회 56kg급 우승,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56kg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서울올림픽 56kg 은메달리스트인 '라이벌' 류서우빈을 꺾은 것에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1991년 9월 독일 도나우싱엔에서 열린 세계역도선수권대회 56kg급에 출전해 대회 출범 100년 만에 한국인 첫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호텔에서 체중(56kg)을 맞췄는데, 경기장 저울로 달아보니 200g이 넘은 거에요. 큰일난거죠. 일반인은 화장실을 한번 다녀오면 200g이 빠지지만, 선수들은 체중을 다 뺀 상태여서 4시간은 기다려야 해요. 1시간 내에 못 빼면 실격이죠. 마침 관계자 한 분이 본인 차에 히터를 켜고 담요를 쓰고 있으라고 권유했죠. 결국 차에서 담요를 덮고 심장박동수를 올리고, 침도 뱉는 등의 노력으로 45분 만에 200g을 뺐어요.(웃음) 지친 상태에서 금메달을 따 더욱 기억에 남죠."





▲ 전병관은 한국 역도 사상 첫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를 휩쓸며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 전병관은 한국 역도 사상 첫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를 휩쓸며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 부모에게 바친 韓 역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전병관은 1992년 4월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 60kg급에서도 1위를 차지해 3개월 앞으로 다가온 바르셀로나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떠올랐다. 사상 첫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한국 역도에 올림픽 금메달이 없었서 부담이 컸죠. 기계적으로, 처절하게 운동했어요. 대회가 다가올수록 불안했죠. 미끄러지고 실패하는 악몽도 꿨어요. 어느 날 선수촌을 방문한 한 상담사께서 '올림픽 출전을 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국가와 본인을 키워준 부모를 위해 한 몸 바친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듣고 마음의 평온을 찾았어요."

그해 7월 16일. 전병관은 류서우빈과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만난다. 전병관은 침착하게 인상에서 132.5kg을 들어 올렸다. 인상 1차 시기에서 130kg을 기록한 류서우빈은 전병관을 이기기 위해 2, 3차 시기에서 135kg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금빛 기류가 전병관 쪽으로 흘렀다. 마침내 용상에서 155kg을 성공하며 합계 287.5kg으로 277.5kg을 기록한 류서우빈을 10kg 차이로 제치고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자신의 목에 걸린 금메달에 감격하며 보고 또 봤다. 한국 역도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중국의 자랑 류서우빈을 꺾고 자랑스럽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중국의 자랑 류서우빈을 꺾고 자랑스럽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운동선수로서 올림픽 금메달을 꿈 꿨는데, 마지막 바벨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내가 실패한 인생은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금메달을 따는 데 정신적인 기반은 부모님이었어요. (눈시울을 붉히며) 선수촌에서 운동을 할 때면 어머니께서 '네가 운동으로 고생하는 만큼 나도 농사를 지으며 땀을 흘리겠다'고 말씀하셨죠. 농번기와 비 농번기를 가리지 않고 매일 고생하셨어요." 그렇게 공부의 길을 가지 못해 아쉬움을 곱씹었던 부모님도 아들의 금빛 신화에 감격하고 자랑스러워했다.





▲ 현역 은퇴 시기에 역도의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해지도자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다
▲ 현역 은퇴 시기에 역도의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해지도자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다

◆ 애틀랜타 실패? '역도의 과학화'를 깨달은 값진 시간

전병관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도 출전했다. 2연패를 기대했지만 아쉽게 용상에서 실격했다. 하지만 이 기간은 전병관이 지도자의 길을 가기위한 값진 예열의 시간이었다. "모든 걸 이뤄 목표 의식이 부족했지만, 내 몸무게의 3배를 들자는 목표를 세웠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역도화 개발이었어요. 올림픽 개막 20일 전에 완성돼 적응을 하지 못한 부분이 아쉬웠죠." 하지만 역도화 개발 과정을 통해 이전까지 의구심을 품었던 역도의 원리를 터득했다. 후배들을 위한 맞춤식 역도화 개발의 신호탄을 알린 것이다.

2000년 위궤양이 도저 현역에서 은퇴한 뒤 2001년부터 국가대표 여자 상비군을 맡으며 그가 깨달은 역도의 과학은 큰 효과를 거뒀다. 그가 지도한 장미란이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75kg이상급에서 은메달, 4년 뒤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그의 지도력은 빛을 보기 시작했다. "과학적인 스포츠가 성공한다고 생각해요. 그 계기는 역도화 개발을 통해 배웠죠." 그가 일궈낸 역도의 과학화는 장미란 외에도 사재혁, 윤진희 등 제2, 제3의 전병관을 탄생시키며 역도가 올림픽 메달밭으로 변모하는 데 일조했다.

"(머리 좋은 지도자의 느낌이 묻어나는데) 우리나라는 인적 자원이 부족합니다. 중국은 세계적인 선수들이 많아서 한 선수가 부상을 입어도 대체 선수가 많죠.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지도자들이 과학적인 바탕 위에서 연구와 노력을 통해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끌어야죠." 은연중 찾아온 역도와 인연. 자신의 운명을 부정해 바벨을 놓으려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보다 역도를 사랑하고, 잘 이해하는 레전드다. "선수 생활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은 만큼 후배들을 도와야죠. 흘린 땀이 헛되지 않도록 힘을 보태고 싶어요. 더팩트 독자여러분, 한국 역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 전병관의 제2의 전성기를 기대해본다
▲ 전병관의 제2의 전성기를 기대해본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배정환 기자>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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