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성현 기자] 2011년 9월, 한국 프로야구계는 가장 빛나던 두 별을 잃었다. 7일 '타격의 달인' 장효조 전 삼성 2군 감독이 세상과 이별을 고한 데 이어, 일주일 후에는 '불세출의 에이스'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프로야구 초창기를 이끈 최고의 스타에서 은퇴 후 굴곡진 인생을 살다 암 투병으로 50대 나이에 별세한 점까지 두 거목이 걸어온 길은 무척 닮았다.
현역 시절 장효조는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이라는 말처럼 7년 연속 3할 타율, 4번의 타격왕, 통산 타율 1위(0.331) 등 화려한 기록을 세웠다. 최동원은 8시즌 통산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의 훌륭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다승왕과 탈삼진 타이틀은 1984년 단 한번에 그쳤을 정도로 기록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동원에게는 기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투혼과 임팩트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20년을 훌쩍 넘긴 현재까지 그의 패기 넘치는 플레이가 또렷이 자리 잡고 있다. 짧았지만 모든 것을 불태웠던 1984년의 강렬한 인상, 그 기억이 명투수 최동원을 떠나보내는 야구 팬들의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 1984년 한국시리즈, 불멸의 명승부 이끈 한마디 "함 해보입시더"
프로야구 출범 셋째 해를 맞은 1984년, 26살의 젊은 투수 최동원에게 2년차 징크스는 없었다. 페넌트레이스 100경기 중 절반이 넘는 51경기에 출장해 선발과 계투를 오가며 27승 13패 6세이브를 올렸다. 지금처럼 철저하게 투수 분업이 없었던 그때, 최동원은 팀 승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마운드에 올랐다. 약체였던 롯데는 리그 최고의 에이스로 떠오른 최동원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동원의 맹활약에 힘입어 후기리그 우승을 거머쥔 롯데는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과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다. 당시 삼성은 껄끄러운 상대였던 OB를 피하기 위해 후기리그 막판 져주기 논란도 불사하며 롯데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맞아들였다. 삼성의 의도대로 성사된 매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전력에서 한 수 아래로 평가 받는 롯데의 패배를 예상했다.
한국시리즈에 나서는 삼성 김영덕 감독은 자신감이 넘쳤다. 최동원의 삼성전 전적은 시즌 막판 져주기 경기로 내준 1승을 제외하면 2승 4패 3세이브에 그치는 평범한 투구였기 때문이다. 롯데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믿을 건 역시 최동원 뿐이었다. 강병철 감독은 "1·3·5·7차전에 최동원을 투입해 4승3패로 우승을 거머쥘 것"이라며 선전포고했다.
팀의 운명을 최동원에게 모두 짊어지게 했다는 마음에 강 감독은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강 감독은 "동원아, 우야겠노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러자 최동원은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라며 전의를 불태웠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 투혼의 한국시리즈 '나홀로 4승'…우승 위해 무쇠팔 내던지다
마침내 시작된 1984년 한국시리즈. 최동원은 예상대로 1차전 선발로 나섰다. 시즌 최고의 승부처에 다다른 최동원의 구위는 삼성을 만나 부진했던 정규 시즌과 사뭇 달랐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마운드는 철저히 최동원 홀로 책임졌다. 9이닝 7피안타 완봉투로 롯데의 4-0 완승을 이끌었다.
3차전에서도 최동원은 9이닝 6피안타 2실점 완투승(롯데 3-2 삼성)을 따며 '불꽃투'를 이어갔다. 하지만 롯데는 최동원이 등판하지 않는 경기에서 모두 패해 2승2패의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예정대로 최동원이 선발로 나선 5차전. 그는 이날 경기에서도 마운드 위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하지만 결과는 롯데의 2-3 패배. 8이닝 6피안타 3실점으로 또다시 완투한 최동원은 아쉬움 속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리즈 전적 2승3패로 역전을 허용한 롯데는 단 한번의 패배도 허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벼랑 끝에 몰린 채 맞은 6차전, 경기 중반 롯데가 3-1로 리드를 잡자 강 감독은 '에이스' 최동원을 투입했다. 5회부터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은 연투의 피곤도 잊고 5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롯데의 6-1 승리. 승부는 마지막 7차전까지 이어지게 됐다.
6차전까지 네 번의 등판, 믿기 힘든 연투 속에서도 최동원은 "7차전에도 무조건 나가겠다"며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1984년 10월 9일 잠실구장 마운드에 또다시 섰다. 의지는 강했지만 최동원의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구위가 떨어져 6회까지 4점을 내주며 흔들렸다. 그렇게 패색이 짙던 8회 초, 유두열의 역전 3점포가 터지며 롯데는 단숨에 6-4로 경기를 뒤집었다.
우승을 눈앞에 둔 9회 말, 여전히 마운드에는 '승부사' 최동원이 있었다. 그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승리를 지켜 내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공 하나 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결과는 3타자 모두 삼진. 우승이 확정되자 최동원은 마운드에서 펄쩍 뛰어올라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우승 축하연장으로 가던 중 터진 쌍코피가 그의 투혼을 단적으로 증명했다. 그렇게 1984년 한국시리즈는 최동원으로 시작해 최동원으로 끝났다.

◆ "못다한 감독 꿈, 하늘에서라도 원 없이 풀었으면…"
1980년대를 수놓은 최동원의 불꽃투는 수많은 '베이스볼 키드'를 만들어 냈다. 최동원을 '영원한 우상'으로 삼았던 소년이 훗날 프로야구 제9구단 NC 다이노스의 구단주가 된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의 사연도 큰 화제가 됐다. 그는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따 낸 최동원 선수야말로 내 마음 속 세상에서 가장 빛난 영웅의 모습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팀을 위해 헌신했던 최동원의 투혼은 일반인 뿐 아니라 동료 선수들에게도 귀감이었다. 현역 시절 최동원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선동렬 전 삼성 감독은 "어렸을 때 동원이 형을 보며 투수가 돼야겠다는 꿈을 꿨다"며 누구보다 빛났던 선배의 활약에 경의를 표했다. 1987년 두 선수는 투구 수 200개를 넘는 15회 맞대결에서 2-2 무승부를 거두며 잊지 못할 명승부를 함께하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 프로야구 30년 역사상 손꼽히는 명장면에는 '최동원'이라는 이름 석 자가 함께했다. 그가 세상에 작별을 고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도 일찍 눈을 감은 고인에 대한 짙은 향수와 그리움이 이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점을 찍었던 화려한 선수 시절과는 달리 은퇴 이후 결코 순탄치 않았던 제2의 인생에 대한 재조명도 지금에서야 눈길을 끌고 있어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고인의 경남고 선배이자 생사의 기로에 섰던 최근까지도 연락을 이어 갔던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고인은 정면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 승부사였으며 팀을 위해 몸을 던졌다. 미래에도 최동원 만큼 기억에 남을 선수는 없다"고 말했다. 선수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평가였다. 고인의 마지막 목표였던 1군 감독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의 한마디로 대신했다. "동원이는 마지막까지 현장 복귀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효조와 같이 감독 돼서 원을 풀었으면…."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yshalex@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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