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일 기자] 염원하던 첫 승을 거두지 못하고 1998 프랑스월드컵을 마치자 당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은 유독 유상철의 재능을 안타까워했다.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할 정도의 재능을 가진 선수인데 기량을 완전히 꽃피우지 못하고 있다면서 나름대로 해석을 덧붙였다. 그 ‘멀티플레이어’는 4년 뒤인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의 주역이 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1년. 춘천기계공고 사령탑을 맡고 있는 유상철(40)은 그라운드에서 뿐만 아니라 방송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며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아우르며 홍명보, 황선홍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한 경력이나 A매치 122경기(18골)에 출전하여 한국인 4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기록을 보면 은퇴 이후 프로팀 지도자로 나설 것으로 예상됐지만 꿈나무 지도에 유달리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소년 선수들의 지도자로 재능을 보이더니 곧장 자신의 이름을 딴 유소년 축구 클럽을 출범시키며 본격적으로 한국 축구 미래의 자원들을 키우고 있다. 2009년 창단한 춘천기계공고 축구부 사령탑을 맡고 있으며 최근에는 박지성 자선경기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현역 시절의 뒷이야기를 들려 주는 등 '돌아온 유비'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20일 오후 춘천. 더팩트은 섭씨 34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 유 감독을 만났다.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에서 현역 시절의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지난 세월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하나둘씩 풀어 내자 이내 진한 추억의 향기가 느껴졌다.
◆ 박지성 자선경기 "나비뱅크, 죽기 살기로 하던데요"
유상철은 지난 15일 '후배' 박지성이 주관한 자선 경기에 출전했다. 오랜만에 후배들과 호흡을 맞췄고 중앙 수비수로 선발 출전했다. 그런데 경기 후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코치로 제의가 왔었는데 경기 하루 전날 뛰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무릎이 좋지 않아서 그간 운동을 못했는데…. 또, 자선 경기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더니 (나비뱅크가)죽기 살기로 뛰더라고요. 솔직히 의아했어요.(웃음)"
유상철은 다음달 4일 무릎 수술을 앞두고 있다. 현역 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무릎이라 자선 경기 내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유비’다운 다부진 각오를 전했다. "내년에도 (박)지성이가 출전 제의를 한다면 몸을 만들어서 명예 회복할게요.(웃음)" 본인은 자선 경기를 개최할 의사가 없는지 물었다. "저는 늦었죠. 은퇴하자마자 했어야 했는데 이제 묻힐 것 같아요.(웃음) 처음에는 (홍)명보 형이 매년 자선 경기를 하니까 시기가 겹치는 것도 곤란 했고요."
자선 경기에서는 잡음이 있었다. 홍보대행사의 미숙한 행정 처리와 아이돌 그룹 참여에 따른 '주객전도' 논란이었다. "아쉬움이 있었죠. 인기 연예인들이 참여 해 주는 것은 감사하고 홍보도 많이 돼요. 그런데 연예인 팬과 축구 팬이 반반씩 나뉜 느낌이었어요. 융화가 되었다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첫 자선 경기였고 시행착오가 있었던 부분은 보완해서 발전시키면 되죠. 내년에도 아시아 지역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줬으면 해요."

◆ 예능 프로도 거뜬? 강심장 '뜨거운 고백' 화제
유상철은 최근 인기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세바퀴, 도전 1000곡, 강심장 등에서 현역 시절 이야기는 물론 축구 팬들이 보지 못한 다양한 끼를 발휘했다. "예능에서 기존 이미지를 벗어나지는 않았고요. 토크 형식으로 축구 이야기를 하는 것은 편한 마음으로 했어요. 대본이 정해져 있는 프로는 잘 못하겠더라고요.(웃음) 아, 도전 1000곡은 쑥스러워서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적극적인 권유로 한번 만 나가겠다고 했고요."
유상철은 강심장에서 현역 시절 왼쪽 눈을 실명한 채 그라운드를 누볐던 사연을 공개했다. 축구 팬들도 적잖은 충격과 감동이 교차했다. "제가 현역 선수였다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과거 친분이 있는 기자 형께 '실명한 사실은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 보도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알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은퇴 이후 털어놓고 싶었다. 자신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모두에게 고백했다.
"단점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용기도 필요한 것이에요." 아픈 과거를 회상하며 눈시울도 붉혔지만 그러한 좌절 속에서도 새로운 날을 꿈꾸며 간절한 마음으로 어려움에 맞섰다. 그리고 찬란한 영광도 맛봤다. 세바퀴에서는 현역 시절 그라운드에서 보이지 않는 기 싸움에 대해서 언급해 화제를 뿌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과거에는 경기 중 자신을 마크하는 선수들끼리 심판이 안 보이는 곳에서 뒷다리를 차고 유니폼을 잡는 등 신경전이 말도 못했어요.(웃음)"

◆ 프로 팀 감독 왜 안하냐고요? "실패하고 싶지 않거든요"
유소년 클럽 운영에서 고등학교 축구부 감독까지. 지금의 경험이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디딤돌이 되리라 믿고 있다. "모두가 어려운 일이지만 고등학교가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대학교 진학, 중학교 선수 중 유망한 선수의 발굴, 사춘기에 따른 성장 변화에 맞게 이끄는 문제 등 참 어려워요. 하지만 제가 은퇴 후 바로 프로팀 지도자를 했다면 고교 선수들의 이 같은 상황을 몰랐겠죠. 제가 과거에 했던 기억만을 놓고 판단했을 것이고요."
유소년 클럽은 서울, 춘천에 각각 운영되고 있다. 담당 코치를 선임해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J리그 시절에 일본 유소년들이 공을 차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어리지만 경기를 운영하는 것은 성인다웠죠. 항상 한국 유소년 시스템에 꿈을 갖고 있어요." 유 감독은 향후 유소년 축구 전문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꿈도 갖고 있다. "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이러한 뜻을 공감하고 도울 수 있는 분들과 함께해야죠."
자연스레 K리그를 비롯한 프로 감독에 대한 욕심을 물어봤다. 황선홍, 신태용 등 동시대에 활약한 선수들이 K리그에서 성공적인 감독으로 자리한 것에 어떠한 느낌일까. "무척 기분이 좋죠. 특히 (황)선홍이 형은 포항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면서 얼굴이 핀 것 같아요. 저도 욕심 있죠.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얼마나 준비가 돼 있느냐가 중요해요. 무턱대고 가서 실패하면 일어서기 힘들죠. 주변에서 말씀하세요. '그 정도 레벨에 왜 프로 안 가고 고생하느냐'고요. 그런데 지도자로서 배워야 할 것이 많아요.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실패하고 싶지 않거든요. 현재 맡은 팀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 도전하고 싶어요."

제2의 삶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유상철. 성공이란 열매를 위해 언제나 준비된 삶을 살아 왔듯 현재 주어진 임무에 감사하며 '위대한 도전'에 나서고 있다. 실명한 왼쪽 눈 때문에 흐릿한 시야로 프로에 데뷔했던 유 감독. 단점을 말하기가 두려워 숨기다가 치료 시기를 놓쳤지만 공에 끈을 달아놓고 자신의 단점을 극복했던 그 열정만큼이나 지금도 축구를 향한 진심 어린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삶의 제2막은 어찌 보면 더 수월한 발걸음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유성현 기자>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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