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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1> '적토마' 고정운 "94 미국WC, 가장 기억남아" ②편

▶ [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1> '적토마' 고정운 "박지성, 성실성에 감동" ①편

고정운 감독의 시선은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 뛰었던 현역 시절이 인터뷰를 하며 다시 생각나서일까. 생각하면 아쉽기만 하고, 또한 가슴 벅차기도 했던 그 추억은 이제 또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는 '적토마의 자양분'이다.





▲ 1989년 일화 천마로 프로에 데뷔한 고정운은 '신인왕'을 차지했다
▲ 1989년 일화 천마로 프로에 데뷔한 고정운은 '신인왕'을 차지했다

◆ 프로 첫해 '신인왕' … "프로의 개념도 없었죠"

고 감독은 전북의 축구 명문인 이리고등학교 출신이다. 학창 시절 전국체전 우승과 함께 MBC배 등 당시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라는 대회는 모조리 휩쓸었다. 그리고 최고의 측면 공격수로 전국에 알려지며 1985년 건국대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 때인 1986년 춘계대학연맹전에서 우승을 경험했고, 특히 4학년 때인 1988년에는 황선홍(2년 후배), 이상윤(1년 후배)등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며 대학 축구 최고의 팀으로 올라섰다.

"내가 입학하기 전에는 건국대가 축구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죠. 그렇지만 좋은 선수들이 들어오면서 ‘한번 해보자’는 투지가 불타올랐고 각종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행복한 추억이죠."





▲ 성남 일화 U-18(풍생고)팀 고정운 감독 / ⓒ 노시훈 기자
▲ 성남 일화 U-18(풍생고)팀 고정운 감독 / ⓒ 노시훈 기자




▲ 성남 일화 U-18(풍생고) 팀 고정운 감독 / ⓒ 노시훈 기자
▲ 성남 일화 U-18(풍생고) 팀 고정운 감독 / ⓒ 노시훈 기자

고정운은 명실상부 대학 축구 최고의 측면 공격수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1989년 일화 천마(현 성남 일화)에 입단했다. 고정운은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일화의 기동력 축구에 빠르게 적응했고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프로 첫해 31경기에 출전해 4골 8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왕’이 됐다.

"사실 당시에는 프로의 개념이 없었어요.(웃음) 지금은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프로에 대해 설명을 해 주죠. 우리 시절에는 천방지축이었죠. 프로가 무엇인지, 몸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회복 훈련이 무엇인지…. 시즌을 마치면 연봉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요.(웃음) 프로 선수로서 마인드가 부족하던 시기였어요."

그러던 고정운에게 결혼과 태극 마크는 일생일대의 전환점이었다. 1989년 일찌감치 결혼한 그는 가정을 책임지며 경제에 눈을 뜨게 됐다. 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최종 예선과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통해 대표팀의 주축 공격수로 성장하며 프로 선수의 진정한 자세를 느끼게 된다.





▲ 고정운에게 태극 마크는 '적토마'의 위상을 널리 알린 소중한 추억이다
▲ 고정운에게 태극 마크는 '적토마'의 위상을 널리 알린 소중한 추억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프로에서도 성공 신화를 썼다. 일화는 1992년 신태용과 러시아 출신의 골키퍼 샤리체프(현재 귀화, 한국 이름 신의손)를 영입하며 전력 강화를 꾀했다. 그리고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 프로축구 사상 첫 리그 3연패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고정운은 1994년 시즌 리그 MVP와 도움왕을 휩쓸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 정도로 대단한 기록인 줄 몰랐죠. 지나고 보니 ‘큰일을 했구나’ 생각하죠. 여자 프로농구에서 신한은행이 5년 연속 우승한 것이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다 우승 기록이라고 하잖아요? 저희도 그 기록과 맞먹는 기록을 세웠으니까, 내가 대단한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1994년 시즌 K리그 MVP 및 도움왕을 거머쥔 고정운
▲ 1994년 시즌 K리그 MVP 및 도움왕을 거머쥔 고정운

◆ 태극 마크의 추억 '1994년 미국월드컵'…아쉬움만 남아

고정운하면 태극 마크를 떠올리는 올드 팬들이 많다. 그런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국가 대표팀 경기는 단연 1994년 미국 월드컵이란다.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벌어진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에서는 이란, 북한과 경기에서 골을 뽑으며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본선 무대에서는 스페인과 치른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였다. 특히 중앙 수비수인 미구엘 나달의 퇴장을 이끌어 내며 승점 1점(2-2 무) 획득의 디딤돌을 놓았다. 그리고 볼리비와 2차전, 독일과 3차전에서도 특유의 저돌적인 플레이를 앞세워 대표팀 공격의 물꼬를 텄다.

"골을 넣었다면 더 좋은 추억이 되었을 텐데…. 항상 지나면 아쉬움이 남죠. 팬들은 고정운이 대표 선수도 10년 넘게 했는데, ‘아쉬울 것 없지 않느냐’고 말씀하세요. 그렇지만 솔직하게 저는 지금 세대가 부러워요. 미국 월드컵을 마치고 독일 레버쿠젠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는데 계약금을 포함해 부수적인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죠. 그러나 지금 정서였다면 팬들이 가만 있을까요? 무조건 보내라고 하셨을 텐데…. 아쉬운 축구 인생이었죠."





▲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고정운의 활약에 유럽 클럽도 주목했다 / ⓒ 노시훈 기자
▲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고정운의 활약에 유럽 클럽도 주목했다 / ⓒ 노시훈 기자

축구선수에게는 유럽 무대와 월드컵에서 뛰는 게 가장 큰 목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재차 기회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설로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2001년 8월 14일 수원 월드컵경기장 개장 경기를 할 때 은퇴를 했어요. 그런데 은퇴식을 할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행사를 마치고 방에 혼자 있는데 서글펐어요. 무엇보다 프랑스 월드컵 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남의 잘못도 아니고요. 나도 책임이 있고, 다 잊었는데 아쉬움이 남아서…"

가끔은 피해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빼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분위기가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에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갈 수 없었다. 그러나 고정운 하면, 축구 팬들은 "잘하는 선수, 90분 동안 쉴 새 없이 뛰어 다닌 성실한 선수"로 기억하기에 자부심을 갖고 유소년들 앞에 서 있다.





▲ 인터뷰 중인 고정운 감독 / ⓒ 노시훈 기자
▲ 인터뷰 중인 고정운 감독 / ⓒ 노시훈 기자

◆ "신태용 감독? 워낙 영리한 친구라서…잘 이겨 낼 것"

고정운은 1997년 일본 프로축구 J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했다. K리그 선수가 J리그로 넘어간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지금의 보편화 된 일본 진출과는 의미가 달랐다. 그리고 1998년 K리그로 복귀하기까지 일본 무대에서 '적토마'의 위상을 널리 알렸다.

"드래프트 제도 때문에 유망주들이 일본이나 해외로 발을 돌리죠. 그렇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J리그는 나중에 가도 된다고 봐요. 어린 선수들은 시간과 기회가 많잖아요. 유럽을 목표로 정진해야죠. 그 현실이 안타까워요."

1998년 시즌 도중 귀국해 포항스틸러스에 입단한 고정운은 이듬해인 1999년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건재를 알렸다. 그리고 그해 9월 5일 전남 드래곤즈와 경기에서 K리그 최초의 '40골-40도움'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이후 2001년 은퇴한 뒤 전남과 서울에서 코치 수업을 받았고 지난 2월 풍생고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 적토마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 ⓒ 노시훈 기자
▲ 적토마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 ⓒ 노시훈 기자

"신태용 감독하고는 성남에 함께 있으니까 자주 연락하죠. (신 감독이 요새 어려운 시기인데) 지도자들은 승패에 좌지우지 되잖아요? 어차피 겪어야 될 일이죠. 지난해에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고,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높은 친구예요. 조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1990년대 국가대표팀을 호령한 홍명보, 황선홍, 신태용 등 고정운 시대를 함께한 동료들은 어느덧 팀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가 됐다. "A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 간의 협조 체제가 무엇보다 중요하죠.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다소 중요하게 여기는 면이 있지만, 저도 개인적으로 국내 축구의 어려운 사정으로 봤을 때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축구 붐 조성에 한몫 했으면 좋겠어요. A대표팀을 우선으로 하지만 홍(명보) 감독에게도 힘을 실어줘야죠."





▲ 현역 시절, 고정운 특유의 포효는 오랜 추억으로 남는다
▲ 현역 시절, 고정운 특유의 포효는 오랜 추억으로 남는다

준족의 공격수, 누구보다 '적토마'라는 애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만능 공격수. '추억'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우리 축구의 역사. 강한 체력을 무기로 날카로운 측면 돌파에 이은 크로스는 우리가 기억하는 고정운의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힘으로 제2, 제 3의 고정운을 발굴해 내는 것을 사명으로 또 한번의 신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라운드를 달리던 고정운의 모습은 세월과 일상에 묻혀 어쩌면 그에게 안락한 주점 한 귀퉁이에서 퇴역 군인의 무용담처럼 소주잔을 기울이며 떠올리는 잠깐의 추억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그의 심장을 뛰게 했던 그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세계 최고의 리그가 되고자 하는 꿈, 월드컵을 들어 올리는 꿈, 그 꿈을 향한 전설은 이제 시작이다.

"일단은 앞서나가고 싶어요. 좋은 선수를 발굴하고 싶고요. 대표팀 감독의 꿈도 있어요. 프로에 있을 때는 지도자를 너무 쉽게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 여기서 인생을 배우고 있어요. 한국 축구를 위해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 고정운은 '전설의 적토마'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 고정운은 '전설의 적토마'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노시훈 기자>

※ [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 두 번째 주인공은 ‘영원한 탁구여왕’ 현정화 現 한국 마사회 감독 / 대한탁구협회 전무입니다.>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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