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몬·아디다스까지 종로에 집결
고궁·한옥·산길 잇는 ‘유산소 성지’로

[더팩트|서울=오승혁 기자] "지금 저 산을 보고 있는데, 막 뛰고 싶어지네요. 당장 달리고 싶어집니다."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북촌의 한 건물 옥상. 숀 슈미트 나이키 ACG 아시아 비즈니스 총괄은 처마 너머로 보이는 북악산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30일 문을 여는 ‘나이키 ACG 북촌 마루’를 소개하던 중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어느새 매장 밖 산길을 향하고 있었다.
당장 운동화를 신고 뛰어나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표정도 밝아졌다. 평소 직접 달리는 사람이라면 눈앞에 펼쳐진 산과 길을 보고 한 번쯤 느껴봤을 충동이었다. 그의 눈빛은 진심으로 가득했다.
이날 ‘오승혁의 현장’이 찾은 북촌에서는 한옥과 좁은 골목, 가파른 언덕 너머로 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걸으면 도심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산길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다.
현장에서 만난 한 러너는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한 골목과 언덕, 내리막 같은 요소들이 결국 러너들을 종로로 불러 모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잭 오시마 나이키 ACG 아시아 브랜드 총괄도 야외 활동을 직접 즐기며 얻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2주 전에는 호주의 강렬한 햇볕 아래에서 클라이밍과 볼더링을 했다"며 각 지역의 자연과 날씨, 이용자 경험이 제품을 만들고 브랜드를 운영하는 과정에 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슈미트 총괄은 러너들이 함께 달리고 어려움을 겪으며 쌓는 경험을 강조했다. 그는 "러너들이 함께 겪는 경험은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다시 일깨워준다"며 "그래서 ACG에 더 큰 열정을 쏟게 된다"고 말했다.
이들의 설명을 듣고 다시 마당 밖을 바라보니 나이키가 북촌에 기능성 제품인 ACG 특화 매장을 만든 이유가 읽혔다. 유동 인구만을 노렸다면 선택할 수 있는 장소는 많다. 하지만 북촌은 매장 안에서도 산이 보이고 문밖으로 나가 골목을 따라 달리면 곧 오르막과 산길을 만나는 동네다.
한옥을 활용한 공간도 흔히 떠올리는 스포츠 매장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마당과 처마, 나무 기둥 사이에 트레일화와 의류, 산행용품이 놓였다. 제품을 빼곡하게 쌓기보다 북촌의 풍경 안에 야외 활동을 위한 장비를 풀어놓은 모습에 가까웠다.
매장 안에서는 국내의 여러 산과 등산 코스를 소개하는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방문객이 단순히 물건을 산 뒤 돌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걷거나 달리도록 이끄는 구성이었다. ACG 제품을 착용하고 등산 인증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로 코인을 모은다. 이렇게 모은 코인은 기념품 캡슐 뽑기 등의 이벤트에 쓰인다.

트레일 러닝 선수 고민철은 한국 산악 지형의 특징으로 많은 돌을 꼽았다. 그는 "제주 지형은 굉장히 돌이 많다"며 "그래서 안정적이고 쿠션이 있는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포장도로 위에서 잠시 신어보는 것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이야기가 실제 산을 달리는 선수의 입을 통해 나왔다.
북촌에서 서촌으로 이동하자 종로의 달라진 풍경이 더 선명해졌다. 인왕산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살로몬과 아디다스 등의 스포츠 브랜드가 운영하는 달리기와 아웃도어 문화를 앞세운 매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 이 일대는 한복을 입은 관광객과 고궁 관람객, 오래된 맛집을 찾는 방문객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곳이었다. 지금은 러닝 조끼를 입고 작은 배낭을 멘 사람, 트레일화 차림으로 인왕산 방향을 확인하는 이들과 관광객들이 조화롭게 섞여 있다.
종로가 ‘유산소 운동의 성지’로 변하고 있다는 말도 이제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경복궁과 서촌, 청와대와 북악산 일대를 연결해 달리는 사람이 늘었고, 지도 위 이동 경로가 강아지 모양으로 완성되는 이른바 ‘댕댕런’도 알려졌다. 평지 위주의 도심 러닝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왕산과 북악산, 남산 등으로 향한다. 도로를 달리던 러너가 산길로 무대를 옮기면서 러닝과 등산의 경계도 흐려졌다.
도심에서 운동을 마친 뒤 식사하거나 커피를 마실 장소가 많다는 것도 종로의 장점이다. 혼자 달릴 수도 있고 여러 명이 모여 코스를 완주한 뒤 주변 상권을 이용하기도 좋다. 고궁과 한옥, 산을 한 번에 배경으로 담을 수 있어 사진과 영상을 남기려는 러닝 크루의 발길도 이어진다.

브랜드들이 종로로 모이는 이유 역시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러너들이 실제로 달리는 길 가까이에 공간을 만들고, 매장 안에서 제품을 설명한 뒤 곧바로 산과 골목에서 경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매장이 늘었다는 사실만으로 종로의 변화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이미 거리에는 먼저 달리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고 브랜드가 그 흐름을 따라 들어온 측면도 있다. 러너와 등산객, 관광객이 한 공간에서 뒤섞이는 모습 자체가 이 지역의 새로운 일상이 됐다.
그 과정이 늘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난달 7일 ‘오승혁의 현장’이 찾았던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러닝용품 때문에 물품보관함을 이용하지 못하는 관람객이 생기면서 박물관이 직접 이용 자제를 요청했다. 일부 러너가 무료 보관함에 옷과 신발, 가방을 넣고 외부로 달리러 나가거나 운영시간이 끝난 뒤 짐을 찾겠다며 문을 두드리는 일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서촌의 좁은 보행로를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리면서 관광객과 퇴근길 시민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출발과 도착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사람이 몰리거나 보행 공간을 오래 차지하면 달리지 않는 시민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어서 지난달 16일 저녁에 찾은 남산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공원은 안내방송과 안내판을 통해 보행에 지장을 주는 5인 이상의 무리 달리기를 삼가 달라고 알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러 명이 대열을 이뤄 뛰면서 보행자가 길 가장자리로 물러서는 상황이 반복됐다. 남산은 종로가 아닌 서울 중구와 용산에 걸쳐 있지만, 종로와 가까워 댕댕런과 남산 트레일 러닝을 함께 즐기는 러너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러닝 문화가 커질수록 이런 불편도 함께 살펴야 한다. 한옥 골목과 고궁 주변은 사진으로 볼 때는 아름답지만 실제 보행로는 좁은 곳이 많다.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관광객과 어린이, 노인도 쉽게 만난다. 속도를 내는 러너가 충분히 피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해도 걷는 사람은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만으로 위압감을 느낄 수 있다.
산길에서는 위험이 더 커진다. 돌과 나무뿌리가 드러난 좁은 길에서 러너와 등산객이 동시에 움직이면 작은 충돌도 낙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혼잡한 곳에서는 속도를 낮추고, 무리를 나눠 한 줄로 이동하며, 보행자가 먼저 지나가도록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달리기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브랜드에도 역할이 생겼다. 제품을 판매하고 러닝 행사를 여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주민과 관광객, 등산객이 함께 길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안전한 이용 문화를 알릴 필요가 있다. 크루를 모아 달린다면 참가 인원과 이동 경로를 조절하고 혼잡한 구간에서 지켜야 할 원칙도 분명히 안내해야 한다.
이날 북촌 마루에서 만난 이들은 자연 속에서 함께 달리는 경험을 거듭 이야기했다. 그 경험이 오래 이어지려면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뒤따라야 한다. 달리는 사람만 즐거운 길은 결국 환영받기 어렵다.
수백 년의 시간이 쌓인 종로에 빠른 속도의 문화가 들어왔다. 고궁을 둘러보는 관광객 옆으로 러너가 지나가고, 등산객이 향하던 산길에 트레일 러닝을 즐기는 젊은 층이 합류했다. 매장 역시 물건을 파는 공간에서 출발 전 모이고 코스를 공유하는 거점으로 변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달리느냐만이 아니다. 관광객과 주민, 등산객의 일상을 밀어내지 않으면서 함께 달릴 방법을 찾는 일이다.
종로는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오래 달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조금 더 빠른 기록이 아니라 주변을 살피는 여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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