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문 접수 개시… 2027년 말 첫 고객 인도 예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차는 나에게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는 거다.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삶의 일부다." -엔초 페라리(1898~1988)
매년 수백 종의 신차가 쏟아지는 시대. 정보는 넘쳐나지만 정작 소비자가 체감할 '진짜 팩트'는 드물다. '팩트 DRIVE'는 <더팩트> 오승혁 기자가 직접 타보고, 확인하고, 묻고 답하는 자동차 콘텐츠다. 흔한 시승기의 답습이 아니라 '오해와 진실'을 짚는 질문형 포맷으로 대중의 궁금증을 푼다. 단순한 스펙 나열은 지양한다. 이제 '팩트 DRIVE'에 시동을 건다. <편집자 주>
[더팩트 | 서울 성북구=오승혁 기자] "벤틀리 토르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어디인가요?"
로빈 페이지(Robin Page) 벤틀리모터스 디자인 총괄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차를 바라보더니 매끄럽게 떨어지는 옆모습을 짚었다. 후면에서 시작해 보닛 끝까지 유려하게 이어지는 차체의 긴 선이 백미라는 설명이었다.
답변을 마친 그가 씩 웃으며 취재진에게 질문을 되돌렸다. 당신 눈엔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듭니까?"
토르칼을 다시 찬찬히 뜯어봤다. 디자이너는 우아한 옆태를 꼽았지만, 솔직히 기자의 눈엔 웅장하게 앞을 틀어막은 거대한 전면 그릴부터 꽂혔다. 사진으로 봤을 땐 '전기차에 굳이 저렇게 큰 그릴이 필요한가' 싶었는데, 실물로 마주하니 묵직한 위압감이 남달랐다.
"저는 이 큼직한 그릴과 앞모습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내 답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빚어낸 디자이너와 현장을 찾은 기자가 각자의 시선으로 아름다움을 논하는 순간, 이날 벤틀리가 이 자리에 왜 사람들을 불렀는지가 선명해졌다.

15일 서울 성북구 북악산 자락. 벤틀리의 첫 순수 전기차를 만나기 위해 벤틀리 전기차 '토르칼' 공개 현장을 찾았다. 가을이 막 발을 들이는 길목. 성북동 골목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자 창밖으로 붉은빛을 머금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스쳤다. 북악산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에 절로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을 흥얼거리게 되는 풍경이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차로 불과 20여 분을 달려왔을 뿐인데, 빽빽한 빌딩 숲 대신 맑은 계곡물에서 노니는 오리와 물고기가 먼저 반겼다. 신차 발표회장으로 향한다기보다 호젓한 가을 산책길에 나선 기분이었다.
그 길 끝자락, 과거 야외 수영장으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한 스튜디오가 나타났다.
- 물 빠진 폐수영장에서 전기차를 공개한 이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물비린내 대신 짙은 가죽 냄새와 커피 향이 훅 끼쳤고, 사람들의 첨벙거림이 가득했을 풀장 바닥은 묵직한 조명과 벨벳 커튼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색할 줄 알았던 '폐수영장'이라는 공간은 벤틀리의 첫 전기차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본래의 쓰임을 다하고 완전히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거듭난 낡은 수영장, 그리고 100년 넘게 우렁찬 12기통 내연기관을 고집해오다 전동화라는 전혀 다른 시대로 뛰어든 벤틀리.
조명이 꺼지고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두터운 커튼이 젖혀지며 은빛 토르칼이 물 빠진 수영장 한가운데로 모습을 드러냈다. 신차 발표회가 아니라, 한 브랜드의 새로운 시작을 함께 축하하는 프라이빗 파티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 "사진발 안 받는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베일을 벗자마자 현장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동시에 "이 차는 사진발을 참 못 받는다"는 우스갯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결코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다. 렌즈를 통해 평면으로 볼 때는 '그저 덩치 크고 그릴만 유독 도드라진 전기 SUV'처럼 보였는데, 실물 앞에 서면 차체의 덩어리감과 볼륨이 주는 압도감이 완전히 다르다.
보통 전기차들은 공기역학을 핑계로 그릴을 밋밋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토르칼은 보란 듯이 벤틀리 고유의 거대한 매트릭스 그릴을 앞머리에 박아 넣었다. 굳이 미래지향적인 척 어색한 티를 내지 않고, 멀리서 봐도 '아, 벤틀리가 왔구나' 싶게 만드는 당당함이다.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대보면 그릴 내부의 정교한 세공 패턴이 마치 잘 깎아낸 귀금속처럼 반짝였다.
디자이너가 극찬했던 측면 라인도 눈에 밟혔다. 덩치가 상당한 대형 SUV인데도 뒤에서 앞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캐릭터 라인 덕분에 차체가 둔하게 주저앉아 보이지 않고 날렵하게 웅크린 맹수처럼 보인다.

- 전기차가 된 벤틀리, 고급스러운 실내는 그대로일까?
전기차 시대로 넘어가며 많은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친환경'과 '미니멀리즘'을 앞세워 실내를 휑하게 비워내곤 한다. 벤틀리는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손잡이에 손을 얹고 가볍게 힘을 주자 육중한 도어가 전동 모터 특유의 묵직한 숨소리를 내며 스르륵 열렸다. 얇은 플라스틱이나 차가운 스크린만 덩그러니 놓인 요즘 전기차와는 결이 다르다. 부드럽게 가공된 최고급 가죽과 정교하게 맞물린 금속 버튼들, 그리고 과하지 않게 배치된 디스플레이가 은은한 앰비언트 라이트 속에 녹아들어 있다.
문을 닫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체결감, 시트에 몸을 파묻었을 때 허리를 감싸 쥐는 포근함까지, 내연기관 시절 플래그십에서 누리던 그 농밀한 대접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동력원만 배터리로 바꿨을 뿐, 우리가 빚는 차는 여전히 벤틀리'라고 실내 전체가 웅변하는 듯했다.

- 888마력에 3억3000만원, 이 차가 던지는 메시지는?
토르칼은 최고출력 888마력, 최대토크 137.7㎏·m라는 무시무시한 힘을 품었다. 1회 충전 주행거리 역시 유럽 WLTP 기준 600km에 달하고, 10%에서 80%까지 충전하는 데 고작 16분이 걸린다.
픽업트럭이나 대형 SUV의 마력이 300 내외인 점을 고려하면 고급스러움 겉모습 안에 짐승 같은 힘과 강렬한 근육을 숨긴 차량이다.
시작 가격은 3억3000만원. 기본 제원과 가격표만 보면 현실 세계의 잣대로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숫자들의 나열이다. 하지만 벤틀리를 계약하는 이들이 단순히 주행거리나 제로백 같은 가성비 숫자를 계산하며 도장을 찍지는 않을 것이다.
이날 토르칼을 가렸던 베일에도 등장한 1919라는 브랜드 설립년도 이후로 100년 넘게 쌓아온 역사, 손끝에 닿는 가죽의 결, 그리고 이 거대한 차체를 타고 도로 위를 미끄러져 나갈 때 느끼는 특별한 경험에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크다.
성북동 산자락을 내려오는 길, 아까 봤던 계곡물과 초가을 단풍잎은 그대로였지만 폐수영장 바닥에서 서늘하게 빛나던 은빛 토르칼의 잔상이 꽤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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