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전남광주=김승일 기자] 1968년 한국에서 '반도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 환갑을 앞둔 한 기업인이 새로운 산업에 뛰어들었다.
전남 강진 출신의 고(故) 김향수 전 아남그룹 명예회장이다.
당시 국내 산업의 중심이 섬유와 경공업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김 회장은 반도체가 향후 전자산업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고 아남산업의 사업 목적에 전자부품 제조업을 추가했다.
국내 기업이 반도체 조립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첫 사례였다.
김 회장의 도전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사업성이 검증되지 않은 첨단산업 진출을 만류했고, 공장을 세운 뒤에도 약 2년간 제대로 된 주문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 시장을 두드린 끝에 1970년 첫 주문을 확보했다. 아남산업은 같은 해 금속 밀봉 포장 방식인 메탈캔(Metal Can) 형태의 반도체를 미국으로 수출했다.
당시 직원은 10명도 안됐지만 이후 생산과 수출 규모는 빠르게 성장했다.
김 전 회장의 장남 김주진 회장은 미국에서 앰코일렉트로닉스를 설립해 해외 영업과 마케팅을 맡았다. 한국의 아남산업이 생산하고 미국 앰코가 판매망을 개척하는 구조였다.
이 흐름은 이후 세계적인 반도체 패키징·테스트 기업인 앰코테크놀로지로 이어졌다.
김향수 회장과 광주의 인연도 깊다.
아남산업은 1997년 광주에 반도체 조립공장을 세웠다. 김 회장은 당시 광주공장 준공식에서 고향인 호남 지역에 첨단산업 기반을 만드는 것이 오랜 바람이었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수도권이 아닌 광주에 반도체 생산기지를 마련하면 지역 일자리를 만들고 기술인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 광주는 다시 한번 국내 반도체 산업 지형 변화의 중심에 서게 됐다.
정부는 올해 광주 군공항 부지를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대상지로 정하고 대규모 반도체 생산시설과 관련 산업 생태계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광주 군공항 일대에는 반도체 팹과 협력기업, 연구·인력양성 시설 등이 들어서는 대규모 산업단지가 계획돼 있다.
정부와 전남광주시는 올해 안에 사업시행자 선정과 클러스터 지정 절차를 마치고, 내년부터 전력·용수 등 핵심 기반시설 구축을 본격화한다는 계획이다.
반도체 공장 4기 가동에 필요한 전력은 약 6.3GW, 용수는 하루 약 65만t으로 추산된다.
정부는 군공항 시설을 2028년 중순까지 다른 군 기지로 임시 분산하고 먼저 활용할 수 있는 부지부터 정비해 반도체 공장 착공 시기를 앞당기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60년 전 김향수 회장이 시작한 사업이 반도체 '후공정'이었다면 이번 호남권 클러스터는 생산시설인 메모리 팹을 중심으로 설계·제조·패키징·AI까지 연결하는 산업 생태계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모와 성격은 다르다.
다만 지역과 반도체 산업의 연결고리는 이어지고 있다.
광주에는 현재도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의 생산기지가 자리 잡고 있고, 국가 AI데이터센터와 AI집적단지 등 첨단산업 기반도 조성돼 있다.
지역 경제계 역시 반도체 산업을 청년 일자리와 지역경제 구조 전환의 계기로 보고 관련 기반 마련에 참여하고 있다.
광주상공회의소 제25대 한상원 회장도 2024년 취임 당시부터 광주 군공항 이전 부지에 미래산업과 글로벌 기업을 유치해야 한다는 구상을 밝혀왔다.
회장 선거 과정에서도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지역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 등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문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이후 광주상의는 군공항 이전과 첨단산업 유치, AI 산업 지원 등을 주요 지역경제 현안으로 제시해 왔고, 올해 8월에는 양대 노총과 지역 각계 인사 등 200여 명이 참여하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범시민추진위원회' 구성을 주관했다.
한 회장은 당시 "반도체 클러스터를 성공시켜 지역의 자녀들이 고향에서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지역 산업과 일자리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가 실제 지역경제 성장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군공항 이전과 산업용지 조성, 막대한 전력·용수 확보, 전문인력 양성은 물론 반도체 기업과 협력업체의 실제 투자까지 뒤따라야 한다.
현재 한국 반도체 산업은 1983년 삼성 이병철 회장이 기흥에 반도체 생산라인을 세우고 1984년 SK하이닉스(당시 현대전자산업)가 이천공장에서 첫 반도체 생산을 개시한 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이런 폭발적인 성장엔 1968년 당시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하던 반도체 산업에 과감히 첫 발을 내디딘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김향수 회장의 공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 그의 고향인 호남에서 추진되는 새로운 반도체 산업 기반이 실제 생산과 일자리, 기업 생태계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숙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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