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전남광주=김승일 기자] 최근 몇 년 사이 헌법재판소의 심판정은 국민에게 익숙한 공간이 됐다.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탄핵심판처럼 국가의 진로를 좌우하는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올라오고, 위헌법률심판과 헌법소원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이 헌법의 이름으로 판단 받는다.
공개변론과 선고가 생중계되는 날이면 수많은 국민이 재판관의 질문 하나, 결정문의 문장 하나까지 지켜본다.
그 화면을 보다 보면 평소 법정에서 보던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헌법재판관들이 입는 짙은 자주색 법복이다.
일반 법관의 검은 법복과 달리 자주색 천에 검은색 Y자형 우단이 내려오는 모습은 한눈에도 헌법재판소만의 옷임을 알게 한다. 탄핵심판처럼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에서는 그 법복 자체가 헌법재판소의 이미지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복은 단순한 근무복이 아니다.
재판하는 사람에게 남들과 다른 옷을 입힌 까닭은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가 행사하는 권한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생각이나 정치적 이해가 아닌 법과 헌법에 따라 판단하라는 무언의 경고이자 국민에게는 재판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약속하는 상징이다.
헌법재판관의 법복은 더욱 그렇다.
헌법재판소가 내리는 판단은 때로 법률 하나의 운명을 바꾸고, 국가기관 사이의 권한을 가르며, 국민의 기본권 범위를 다시 정한다. 대통령을 파면할 것인지조차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에 달리는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는 말은 결국 이런 순간에 시험받는다.
법치란 단순히 법률이 많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도 법 아래에 있고, 정치적으로 불리한 결정이라 해도 정해진 절차와 사법적 판단을 존중한다는 사회적 약속에 가깝다

하지만 요즘 우리의 현실을 보면 법원의 판결과 헌법재판소의 결정마저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결론이면 정의로운 판결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치적 판결이라고 단정한다. 재판관 개인의 성향과 출신을 먼저 따지고, 결정이 나오기도 전에 어느 편의 사람인지부터 구분하려 한다.
사법부를 향한 국민의 신뢰 역시 정치적 상황과 진영에 따라 크게 출렁이고 있다.
이는 법치국가에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법원의 힘에는 군대도 행정력도 없다. 판결문 몇 장으로 국가기관과 국민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그 판단 절차와 권위를 받아들인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무너지면 법복의 권위도 함께 무너진다.
그런 점에서 헌법재판관의 자주색 법복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되짚어볼 만하다.
헌법재판소가 출범한 1988년 10월, 초대 재판부는 헌재를 상징할 기와 휘장, 재판관 법복을 논의했다.
당시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김양균 초대 헌법재판관이 수십 종류의 도안을 직접 고안해 제시했고 재판관들의 논의를 거쳐 지금 법복의 기본 형태가 만들어졌다.

자주색은 헌법이 가진 최고의 권위를 상징한다. 가슴을 따라 내려오는 Y자 형태 역시 헌법과 법률을 둘러싼 문제를 풀어내는 '열쇠'와 사회의 갈등을 마지막으로 받아들이는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표현했다.
헌법재판소 휘장 역시 같은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2017년 한자 '憲'을 한글 '헌법'으로 바꾸는 등 모습은 다듬어졌지만 초대 재판부가 만들었던 기본 형태와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국가 최고 헌법기관의 상징을 외부 유명 디자이너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재판관 스스로 고민해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헌법기관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입을 옷과 사용할 휘장에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인지 고민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38년이 흘렀다. 이제 국민은 헌법재판관들의 얼굴뿐 아니라 법복의 모습까지 익숙하게 안다. 반대로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을 이렇게 가까이, 그리고 치열하게 평가했던 시대도 드물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 자주색 법복은 과거보다 더 무거워져야 한다.
법복을 입었다고 저절로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국민에게 존중받으라고 요구한다고 신뢰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재판관은 자신을 임명한 권력이나 자신과 가까운 정치적 진영이 아니라 헌법을 바라봐야 한다. 판단 과정은 치밀해야 하고 논리는 설득력이 있어야 하며, 같은 원칙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
정치권과 국민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만 존중한다면 그것은 법치가 아니다. 재판의 잘못을 비판할 자유는 당연히 보장돼야 하지만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재판관을 정치적 적으로 규정하고 사법기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법치주의는 법관만 지키는 제도가 아니다.
판결하는 사람은 권력을 절제해야 하고, 정치권은 사법부의 독립을 존중해야 하며, 국민은 결과와 별개로 절차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헌법재판소 심판정의 자주색 법복은 바로 그 약속의 상징이어야 한다.
38년 전 한 재판관이 그려낸 법복의 선과 색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법복의 진짜 권위는 디자인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옷을 입은 사람이 헌법 앞에서 얼마나 독립적이고 공정하게 판단하는지, 그리고 그 판단을 국민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자주색 법복이 무거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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