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박순규 기자] 골을 넣어야만 경기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번의 패스, 한 걸음의 이동, 상대 수비수를 끌어내는 움직임 하나가 90분의 흐름을 바꾼다.
30일(한국시간) 스페인 세비야의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에서 펼쳐진 2026~2027 라리가 3라운드에 맞대결을 펼친 세비야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경기가 그랬다. 이강인(25)은 슈팅 하나 없이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전반 4분 페널티박스 오른쪽에서 알렉스 바에나의 침투를 읽고 수비 사이로 왼발 패스를 찔렀다. 바에나는 이를 골로 연결했다. 이강인의 라리가 복귀 후 첫 도움, 시즌 1골 1도움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현지에서 주목한 것은 ‘도움 1개’라는 숫자만이 아니었다. 스페인 스포츠지 '아스'는 세비야전 직후 아틀레티코를 두고 의미심장한 제목을 달았다. ‘9번은 없지만 10번들이 있다(Sin nueves, pero con dieces).’
정통 스트라이커 훌리안 알바레스가 이적 문제로 빠지고 알렉산데르 쇠를로트까지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이강인과 바에나, 파블로 바리오스, 모르텐 율만이 만든 중앙의 ‘마법의 사각형’이 경기를 지배했다는 평가였다. 아스는 특히 이강인이 오른쪽에서 편안하게 플레이했고 율만의 보호 아래 공격적 재능을 자유롭게 펼쳤다고 분석했다. 아틀레티코는 실제로 58.3%의 점유율을 기록했고, 루크먼의 두 번째 골은 9명의 선수가 무려 22차례 패스를 주고받은 74초짜리 공격 끝에 나왔다.

더 직접적인 평가는 아스의 선수별 분석에서 나왔다. 매체는 "시메오네는 이강인을 골문에 더 가깝게 두고 싶어 한다"고 분석하며 그의 라인 파괴 능력과 기술, 팀 플레이를 높게 평가했다. 오른쪽에서 공격을 조립하고 중앙으로 들어와 결정적 패스를 넣는 능력 때문에 이강인이 시메오네의 전술에서 중요한 선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강인의 경기 지표다. 축구통계매체 ‘풋몹’은 이강인에게 평점 8.0을 부여했다. 정작 그는 이날 슈팅을 단 한 차례도 기록하지 않았다. 최전방 투톱으로 출전한 선수가 슈팅 없이 8점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 이유는 기록의 다른 곳에 숨어 있다. 이강인은 72분 동안 44차례 공을 터치하면서 32차례 패스 가운데 30개를 동료에게 정확하게 연결했다. 패스 성공률은 94%에 달했고, 두 차례 시도한 긴 패스도 모두 성공했다. 무엇보다 전반 4분 바에나의 침투를 읽고 수비진 사이로 찔러 넣은 왼발 패스로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풋몹의 평점 8.0은 바로 이강인의 이날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얼마나 많이 슈팅했느냐’보다 ‘공격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움직였느냐’가 더 중요했다는 의미다. 이강인은 자신이 직접 마무리하는 대신 동료가 가장 위협적으로 슈팅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냈고, 공을 소유할 때는 좀처럼 공격 흐름을 끊지 않았다.
슈팅 0개, 도움 1개, 패스 성공률 94%, 평점 8.0.
네 개의 숫자를 함께 놓으면 시메오네가 왜 이강인을 정통 스트라이커의 대체재가 아닌 ‘공격의 만능키’로 바라보는지가 보인다. 골을 넣는 9번이 없어도 골이 만들어지도록 공격의 길을 여는 것. 이날 이강인이 수행한 임무는 바로 그것이었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오는가.
첫째는 ‘공간을 읽는 능력’이다. 이강인은 전형적인 9번처럼 상대 센터백 사이에서 공을 기다리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빠졌다가 중앙으로 들어오고, 때로는 중원까지 내려가 패스 연결에 가담한다. 그 움직임을 따라 센터백이나 미드필더가 이동하면 그 뒤에 공간이 생긴다. 바에나와 루크먼, 줄리아노 시메오네가 바로 그 공간을 이용한다.
따라서 이강인의 움직임은 개인의 이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선수의 장점을 살리는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세비야전이 대표적이다. 지난 두 경기에서 원톱 역할을 맡느라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던 루크먼은 왼쪽 측면으로 돌아가자 살아났다. 전반 26분 골까지 터뜨렸다. 아스 역시 루크먼이 9번 자리에서 벗어나자 훨씬 편안해졌다고 평가했다.
둘째는 ‘마지막 패스’다. 전반 4분 도움은 우연히 빈 공간으로 들어간 패스가 아니었다. 이강인은 직접 왼발 슛을 때릴 것처럼 움직여 수비의 시선을 끌어놓은 뒤 순간적으로 바에나의 움직임을 읽었다. 수비수 세 명 사이를 관통하는 패스였다.
약 10년 전 두 선수를 발렌시아 자치주 U-16 대표팀에서 지도했던 하비에르 라포라는 이미 시즌 전에 이 조합을 예견했다. 그는 이강인과 바에나를 모두 "10번으로 뛸 수 있는 선수"로 평가하면서 정확성, 마지막 패스, 킥, 득점력과 세트피스 능력을 공통된 장점으로 꼽았다. 당시 이강인은 10번, 바에나는 왼쪽에서 주로 뛰었으며 둘은 숙소에서도 같은 방을 쓸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10년 전 지도자의 예상이 라리가에서 현실이 된 셈이다.
셋째, 시메오네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전술적 헌신’이다. 화려한 테크닉만으로 시메오네의 신뢰를 얻기는 어렵다. 그의 축구에서는 공격수도 압박해야 하고, 미드필더도 공간을 메워야 하며, 공을 잃는 순간 모두가 수비수가 돼야 한다. 시메오네는 이미 개막전 뒤 이강인을 두고 전술적 요구에 맞춰 플레이하고 팀에 헌신하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세비야전 뒤 그의 말은 더 의미심장했다. 시메오네는 특정 선수를 앞세우기보다 팀 전체를 평가하면서 알바레스와 쇠를로트가 없어도 2선 선수들이 공간으로 침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스트라이커가 없다고 공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며 선수들이 경기 상황을 해석하고 전술에 적용한 능력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강인의 가치가 선명해진다. 시메오네가 원하는 것은 ‘가짜 9번 한 명’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누군가 9번이 되고, 누군가는 10번이 되며, 또 다른 선수가 측면으로 빠지는 유동적 공격이다. 바에나 역시 경기 후 "공격수들은 모두 가짜 9번으로 뛸 수 있다"면서 정통 스트라이커 부재에도 아틀레티코가 3경기에서 7골을 넣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강인이 주목받는 네 번째 이유는 바로 이 ‘포지션의 경계’를 허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윙어가 될 수 있고, 중앙의 10번이 될 수 있으며, 두 번째 공격수로 올라설 수도 있다. 필요하면 중원으로 내려가 빌드업에 관여한다. 골문 앞에서는 직접 슈팅도 가능하다.
전형적인 센터포워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미드필더도 아니다. 이 때문에 앙투안 그리즈만이 떠오른다. 그리즈만은 시메오네 체제에서 한 자리에 머문 적이 거의 없었다. 최전방과 2선, 측면을 오가며 골을 넣고 패스를 공급했고, 압박과 수비에도 적극 가담했다. 시메오네가 가장 사랑했던 공격수는 가장 많은 골을 넣는 선수인 동시에 가장 많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선수였다.
이강인이 등번호 7번을 물려받았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아스는 개막전 직후 이강인을 ‘시메오네의 새로운 천재’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리즈만이 떠난 뒤 굳어 있는 경기를 개인 기술로 풀어낼 창조적 자원이 필요했던 아틀레티코에 이강인이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아틀레티코 출신의 스페인 대표 공격수였던 키코 나르바에스의 평가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세비야전 뒤 카데나 세르에서 바리오스와 이강인, 바에나를 이번 시즌 창조성을 담당할 핵심 선수로 꼽았다. 세 선수가 경기장에 있어야 공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 아직 몸 상태가 100%가 아닌 만큼 시즌이 진행될수록 더 좋아질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Ca
결국 이강인을 향한 현지의 관심은 1골 1도움 때문만이 아니다. 골은 결과다. 현지 전문가들이 보는 것은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공을 받을 위치를 찾고, 상대 압박을 피하며, 패스 길을 만들고, 동료에게 공간을 제공한다. 필요하면 직접 해결하고, 그렇지 않으면 더 좋은 위치에 있는 동료를 선택한다. 무엇보다 여러 포지션을 오가면서도 팀의 전술적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정통 9번이 없는 상황은 시메오네에게 위기였다. 그러나 궁즉변(窮則變), 궁하면 변한다고 했다. 시메오네는 스트라이커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대신 공격 방식 자체를 바꿨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이강인을 세웠다. 세비야전 전반 4분의 도움은 기록지에는 ‘1어시스트’로 남는다. 그러나 시메오네에게는 훨씬 큰 의미일 수 있다. 오른쪽 윙어도, 10번도, 두 번째 공격수도 될 수 있는 선수가 가장 필요한 순간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9번’은 없었다. 대신 시메오네에게는 여러 개의 열쇠를 한 손에 쥔 이강인이 있었다. 시즌은 이제 세 경기밖에 지나지 않았다. 섣부른 ‘제2의 그리즈만’이라는 수식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지고 있다. 이강인은 아틀레티코에서 어느 한 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선수가 아니라, 경기 상황에 따라 시메오네가 가장 먼저 꺼내 들 수 있는 ‘공격의 만능키’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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