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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 없으니 이강인이 보였다...시메오네의 역발상 '투톱' 적중 [박순규의 창]
10년 만에 다시 만난 이강인-바에나 선제골 합작…‘9번 공백’이 만든 알레띠의 새로운 공격 공식

세비야 원정경기에서 3-1승리를 거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들./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세비야 원정경기에서 3-1승리를 거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들./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위기는 뜻밖의 순간에 새로운 영웅과 해법을 탄생시킨다. 주포 훌리안 알바레스의 이적 기류와 알렉산데르 쇠를로트의 예상치 못한 부상.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 마드리드)의 전방을 책임져야 할 정통 ‘9번’ 스트라이커 자리가 일시에 비었을 때 안달루시아 원정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우려가 가득했다.

상대는 개막 2연승으로 기세를 올리던 세비야 FC. 더욱이 상대 수장 루이스 가르시아 플라사는 마요르카 시절 이강인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지도자였다. 하지만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은 판을 뒤집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 중심에는 미드필더 이강인(25)과 알렉스 바에나를 최전방에 세운 파격적인 ‘변칙 투톱’이 있었다. 다소 낯설어 보였던 이 카드는 불과 4분 만에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을 침묵시켰다.

전반 4분. 페널티박스 오른쪽에서 이강인은 골문 쪽으로 치고 들어갈 듯 상체 동작으로 수비수를 흔들었다. 개막전에서 환상적인 왼발 골을 터뜨렸던 장면처럼 직접 슈팅을 시도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선택은 달랐다. 이강인의 왼발을 떠난 송곳 같은 전진 패스는 세비야 수비진의 빈틈을 정확히 꿰뚫었다. 골문으로 파고들던 바에나는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지체하지 않았다. 논스톱 오른발 대각선 슛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이강인의 라리가 복귀 후 첫 도움. 그리고 AT 마드리드의 3-1 승리를 여는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우연으로만 보기 어렵다. 두 선수의 인연은 약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렌시아 CF 유스 소속이던 이강인과 비야레알 CF 유스에서 성장하던 바에나는 발렌시아 자치주 U-15·U-16 대표팀에서 함께 뛰며 호흡을 맞췄다. 서로 다른 클럽에서 성장했지만 지역대표팀에서는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

'개막전 원더골의 주인공' 이강인(오른쪽)이 30일 세비야와 2026~27 라리가 3라운드 원정경기에서 전반 4분만에 바에나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한 뒤 포옹하고 있다./쿠팡플레이 중계화면 캡처
'개막전 원더골의 주인공' 이강인(오른쪽)이 30일 세비야와 2026~27 라리가 3라운드 원정경기에서 전반 4분만에 바에나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한 뒤 포옹하고 있다./쿠팡플레이 중계화면 캡처

어린 시절 함께 공을 주고받던 두 소년이 10년의 세월을 돌아 유럽 정상급 클럽의 최전방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라리가에서 골을 합작했다. 이강인과 바에나는 2016년 발렌시아 자치주 U-16 대표팀에서 함께 뛰며 친분을 쌓았다. 당시 이강인이 등번호 10번을 달고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바에나는 7번을 달아 주로 왼쪽에서 뛰었다. 두 선수는 숙소에서도 같은 방을 썼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시간은 흘렀지만 축구의 언어는 통했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이강인이 이날 슈팅을 단 한 차례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경기 영향력은 작지 않았다. 72분 동안 44차례 공을 터치했고 32차례 패스 가운데 30개를 성공시켰다. 패스 성공률 94%. 긴 패스도 두 차례 모두 동료에게 정확히 전달했다. 축구통계매체 ‘풋몹’은 이강인에게 평점 8.0을 줬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한 번의 패스로 경기의 문을 열었다. 축구에서 공격수의 가치를 골 숫자로만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이강인은 골문 앞에 머물지 않았다. 때로는 2선으로 내려와 공을 받았고, 측면으로 움직였으며, 바에나와 끊임없이 위치를 바꿨다. 두 선수가 움직일 때마다 세비야 수비진의 기준점도 흔들렸다.

그 연쇄효과가 컸다. 그동안 최전방 원톱의 부담을 떠안았던 아데몰라 루크먼은 본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왼쪽 측면으로 돌아갔다. 루크먼은 전반 26분 추가골을 터뜨리며 시메오네의 선택에 화답했다. 바에나도 다시 골망을 흔들며 멀티골을 완성했다.

전반에만 3골. ‘9번’이 사라진 AT 마드리드가 오히려 올 시즌 가장 폭발적인 공격력을 보여준 역설적인 장면이었다. 시메오네가 과거 앙투안 그리즈만을 활용했던 방식이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성기의 그리즈만은 전형적인 센터포워드의 틀에 갇힌 공격수가 아니었다. 최전방과 2선, 측면을 자유롭게 오가며 패스를 연결했고 필요할 때는 직접 해결사가 됐다. 한 포지션을 책임지는 선수가 아니라 공격 전체를 움직이는 ‘만능키’였다.

2016년 발레시아주 U-16대표팀에서 함께 활약할 당시의 이강인과 바에나(아래줄 가운데)./발렌시아 자치 축구 연맹
2016년 발레시아주 U-16대표팀에서 함께 활약할 당시의 이강인과 바에나(아래줄 가운데)./발렌시아 자치 축구 연맹

물론 이제 라리가 3경기를 치른 이강인을 벌써 ‘제2의 그리즈만’으로 부르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나 그리즈만의 등번호 7번을 물려받은 이강인을 시메오네가 특정 포지션에 가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개막전에서는 후반 교체 투입돼 환상적인 왼발 골을 터뜨렸다. 비야레알과의 2라운드에서는 최전방과 좌우를 넘나들며 6차례 슈팅을 시도했다. 세비야전에서는 바에나와 투톱으로 선발 출전해 결정적인 도움을 기록했다.

세 경기에서 보여준 얼굴이 모두 다르다. 바로 그것이 이강인의 경쟁력이다. 패스가 필요할 때는 플레이메이커가 되고, 측면에서는 드리블러가 된다. 페널티박스 주변에서는 직접 골문을 겨냥하고, 필요하면 최전방 공격수 역할까지 맡는다. 포지션이 없는 선수가 아니라 여러 포지션의 기능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는 선수에 가깝다.

바에나와의 궁합은 그 가능성을 더욱 넓혀준다. 기술과 시야가 뛰어난 두 선수가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면 상대 센터백은 누구를 따라가고, 누가 만드는 공간을 막아야 할지 혼란에 빠진다. 스페인 현지에서 이강인과 바에나, 파블로 바리오스, 모르텐 율만을 묶어 ‘마법의 사각형’으로 평가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개인의 이름값보다 선수들 사이의 ‘관계’와 ‘움직임’이 공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의미다.

시메오네의 용병술 역시 평가받아 마땅하다. 좋은 감독은 최고의 선수 11명을 그라운드에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수들의 장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결해 하나의 팀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정통 스트라이커가 사라지자 시메오네는 미드필더 둘을 최전방에 세웠다. 최전방에서 제 능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하던 루크먼은 측면으로 돌렸다. 약점을 억지로 감추지 않고 선수들의 위치를 바꿔 새로운 강점으로 만들었다.

궁즉통(窮則通)이라고 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흥미롭게도 5년 전 마요르카 입단 당시 이강인에게 공격적이고 정확한 플레이와 좋은 패스, 득점과 찬스 창출을 주문했던 가르시아 플라사는 이날 반대편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강인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옛 스승이었지만, 한층 성장하고 다양해진 제자의 움직임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AT 마드리드는 세비야 원정에서 3-1로 승리하며 2승1무, 승점 7을 기록했다. 3라운드 중간 순위에서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승점 3보다 더 값진 수확이 있다. 알바레스와 쇠를로트의 공백 속에서 새로운 공격 해법을 찾았다는 점이다. 10년 전 발렌시아 지역대표팀에서 함께 뛰었던 이강인과 바에나는 이제 AT 마드리드 최전방에서 다시 서로의 움직임을 읽고 있다.

이강인이 찔렀고, 바에나가 끝냈다. 단순한 선제골 하나의 합작이 아니다. ‘9번이 없으면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는 시메오네의 고민에 두 선수가 내놓은 명쾌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답의 중심에서 그리즈만의 7번을 물려받은 이강인이 점점 ‘공격의 만능키’로 진화하고 있다. ‘9번’의 부재가 위기였다면, 이강인의 발견은 그 위기가 만들어낸 뜻밖의 소득이다.

2016년 발레시아주 U-16대표팀에서 함께 활약할 당시의 이강인과 바에나(아래줄 가운데)./발렌시아 자치 축구 연맹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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