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초로 전시 도입…4개의 주제로 묶인 20편이 작품 놓여 있어

[더팩트|박지윤 기자] 여성 서사와 다양성을 화두로 삼은 콘텐츠를 조명하는 벡델데이가 올해로 7회를 맞았다. 이들은 여성 서사를 다룬 다양한 영화와 시리즈를 통해 성평등한 콘텐츠의 현재를 돌아보고 창작자와 관객들이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을 연다.
DGK(한국영화감독조합)가 주최하고 주관하는 벡델데이 2026이 오는 29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연남장에서 진행된다. 이는 대중문화의 대표 격인 한국의 영화와 시리즈를 통해 양성평등재현을 돌아보고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하는 콘텐츠 페스티벌로, 2020년 미국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양성평등지수로 제시한 세 가지 테스트에서 착안해 기획된 이후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그동안 양성평등주간(9월 1일~7일) 중에 진행됐으나 이번에는 조금 일찍 대중과 만나게 됐다. 올해 최초로 도입된 전시에 적합한 공간에서 진행돼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수상한 여자들' '살아남는 여자들' '얽히고설킨 여자들' '일 벌이는 여자들'이라는 네 개의 주제로 묶인 벡델초이스 10의 영화 부문과 시리즈 부문에 오른 20편의 작품이 놓여 있다.
코로나19 이후 시작된 벡델데이는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영화 속에서 양성평등이 얼마나 균등하게 재현되는가를 가늠하기 위해 만든 ①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두 사람 나올 것 ②1번의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 ③이들의 대화 소재나 주제가 남성 캐릭터에 관한 것만이 아닐 것이라는 기존 벡델 테스트에 ④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⑤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과 비중이 동등할 것 ⑥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⑦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4가지 항목을 추가하며 기준을 새롭게 정립한 '벡델테스트 7'을 기반으로 양성평등 관점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품은 작품을 선정하고 있다.
올해 벡델데이는 위의 기준을 바탕으로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공개된 영화 128편(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개봉작 및 OTT 오리지널)과 시리즈 102편(공중파 및 종합편성채널, 케이블 채널, OTT 오리지널 등에서 공개된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했다.

그렇게 공개된 영화 부문 '벡델초이스 10'에는 역사를 새롭게 바라본 여성의 시선에 장르적 재미와 대중성을 더한 '교생실습'(감독 김민하), 남성의 이야기를 여성들의 기억으로 새롭게 구성하며 벡델의 기준을 확장한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감독 조희영), 서로를 향한 여성 교도관과 수용자의 시도가 관계를 변화시킨 '만남의 집'(감독 차정윤), 멜로 장르에서 자신의 삶과 선택을 이끌어가는 여성 캐릭터의 현재성을 확장한 '만약에 우리'(감독 김도영)가 이름을 올렸다.
승진에서 밀려난 중년 여성의 노동과 좌절을 플라멩코와 연결한 '매드 댄스 오피스'(감독 조현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열여덟 살 여성의 복잡한 내면을 끝까지 밀고 나간 '세계의 주인'(감독 윤가은), 장애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세심하게 담아낸 '우리 둘 사이에'(감독 성지혜), 여성 인물을 범죄 스릴러의 중심에 세운 '하얀 차를 탄 여자'(감독 고혜진), 제주 4·3을 견딘 여성들의 구술과 기억을 기록한 '한란'(감독 하명미), 좋은 딸과 나쁜 딸이라는 이분법을 넘으며 역사와 공동체 그리고 가족을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본 '홍이'(감독 황슬기)도 만나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부터 조기 폐경과 결혼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 등 일하는 40대 여성의 현실을 담아낸 '다음생은 없으니까', 가정폭력 생존자가 분노와 불안 사이에서 선택을 이어가는 공조극인 '당신이 죽였다', 이름 없이 자본의 톱니바퀴 아래 갈려 나가던 여자가 사라 킴이라는 자신을 만들어 빛을 손에 넣는 과정을 다룬 '레이디 두아',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조력자의 복잡한 관계와 생존자들의 서로 다른 경험을 다룬 '아너: 그녀들의 법정', 여성에 대한 확증편향을 서사의 덫으로 삼은 '자백의 대가'가 올해 시리즈 부문 '벡델초이스 10'으로 선정됐다.
폭력과 검열로 얼룩진 1980년 연예계를 관통하며 아름다움과 용기를 서로에게 견장처럼 달아주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애마', IMF 외환위기 시절 유리천장을 깨는 여성을 앞세운 경쾌한 시대극 '언더커버 미쓰홍', 성별의 경계를 허문 세포들을 통해 남녀의 미묘한 내면을 세밀하게 시각화하며 여성 심리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넓힌 '유미의 세포들 3', 평범하면서도 특별하게 여성 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은중과 상연', 남성 주인공뿐 아니라 각자의 불안과 서로의 꿈을 인정하고 응원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도 포함됐다.
벡델데이 2026 프로그래머인 임대형 감독은 <더팩트>에 "올해 시리즈 드라마 부분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여성 중심의 서사가 양적으로 확대됐다는 점"이라며 "주요 시청자층이 여성이고 작가들도 여성의 비중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성 서사의 양적 성장은 산업 논리상 필연적인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올해는 제작자 영역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늘어 기획과 창작의 여러 층위에서 여성이 주도권을 쥐는 흐름이 뚜렷해졌다"고 바라봤다.
또 다른 프로그래머인 윤단비 감독도 "영화에서 여성들이 전보다 좀 더 성질이 나빠지거나 비겁해져도 되고 이상해되 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예전에는 여성 캐릭터가 나오면 그 인물이 어떤 올바른 가치를 대표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는데 이제는 한 사람으로서 못난 선택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 것 같다. 조금 덜 모범적이고 더 재밌어졌다"고 달라진 지점을 언급했다.

OTT 플랫폼의 다변화가 곧 콘텐츠의 다변화로 이어지고 있고 여성 서사를 내세운 작품들은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시도하며 시청자들을 성공적으로 사로잡고 있다. 영화 산업도 분명한 위기가 있지만 그 와중에도 독립영화진영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고 재능 있는 여성 감독들도 배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났다. 멜로와 가족극뿐만 아니라 스릴러 법정물 시대극 오피스코미디 등에서도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끄는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양적 성장이 무조건적으로 서사의 다양성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다시 살펴봐야될 문제다.
이와 관련해 임 감독은 "여성 서사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으면서 역설적이게 '쎈캐' '악녀' 위주의 캐릭터들이 양산되고 상투적인 공식과 법칙에 갇히게 되는 건 아닐지 우려가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었다"며 "양성 평등의 관점에서는 분명한 진보이지만 그 진보가 패턴화한 장르 공식으로 수렴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시선도 필요한 시점이라는 데 심사위원들 대부분 동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설명했다.
윤 감독은 "여성 캐릭터에게 또 다른 모범 답안을 요구하는 건 경계하고 싶다. 꼭 강하고 용감하고 정의로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작품이 모든 여성을 대표할 수 없으니 완벽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며 "대신 서로 다른 작품에서 더 많은 종류의 캐릭터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내비쳤다.
여전히 넘어야 할 산도 존재한다. 벡델데이 2024에서는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상업영화에서 여성 감독의 활약이 돋보였으나 한국영화 개봉작의 급감과 함께 성비의 불균형이 더 두드러진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5편에 머무른 것.
이에 윤 감독은 "지금은 성별을 떠나 영화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때이지만 이럴수록 신인과 여성 창작자의 문이 먼저 좁아지는 것도 사실"이라며 "중요한 건 데뷔할 기회를 한 번 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야 하는 것 같다. 한 편이 나올 때마다 또 가능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다음 작품을 자연스럽게 맡길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올해 벡델데이의 슬로건은 지난해와 다른 '해피 벡델데이'다. 여기에는 양성평등과 문화다양성을 어렵거나 무겁게 접근하기보다 영화와 시리즈를 매개로 누구나 쉽고 즐겁게 공감하고 참여하는 축제를 만들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에 따라 올해 행사는 상영 중심에서 더 나아가 상영·토크·전시와 참여형 콘텐츠가 어우러지는 페스티벌로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올해 행사를 처음 접하는 이들부터 매년 벡델데이를 빛내는 영화 팬들까지,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겠다는 각오다.
지금도 재밌는 여성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 덕분에 기존의 벡델테스트보다 한층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한 작품이 한국의 영화와 시리즈 부문에서 각각 10편씩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를 소개하는 벡델데이는 창작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잘 봤다는 사실로 힘을 주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작품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임 감독은 "행사 자체가 유의미한 변화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러한 취지의 행사가 존재하고 지속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다"고 윤 감독은 "벡델데이는 작품을 합격과 불합격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영화와 시리즈를 평소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고 미처 몰랐던 작품과 사람을 하나 더 발견하는 행사다. 성평등에 관해 잘 알아야만 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재밌는 영화나 좋아하는 배우를 보러 왔다가 자연스럽게 알게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jiyoon-1031@tf.co.kr
[연예부 | ssent@tf.co.kr]
-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 이메일: jebo@tf.co.kr
-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