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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 0원’ 안세영, 그래도 세계가 인정한 ‘진짜 여제’ [박순규의 창]
야마구치 2-0 완파·6경기 무실게임…지난해 4강 탈락 딛고 3년 만에 세계선수권 정상 탈환

한국의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이 23일 인도 뉴델리 인디라 간디 아레나에서 끝난 2026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세계선수권 여자단식 결승에 일본의 디펜딩 챔피언 야마구치 아카네를 49분 만에 2-0(21-17 21-14)으로 완파한 뒤 포효하고 있다./뉴델리=AP.뉴시스
한국의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이 23일 인도 뉴델리 인디라 간디 아레나에서 끝난 2026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세계선수권 여자단식 결승에 일본의 디펜딩 챔피언 야마구치 아카네를 49분 만에 2-0(21-17 21-14)으로 완파한 뒤 포효하고 있다./뉴델리=AP.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권토중래(捲土重來).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돌아온다는 말만큼 지금의 안세영(24)을 잘 설명하는 표현도 드물다.

23일 인도 뉴델리 인디라 간디 아레나에서 끝난 2026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세계선수권 여자단식 결승. 안세영은 세계 2위이자 디펜딩 챔피언 야마구치 아카네를 49분 만에 2-0(21-17 21-14)으로 완파했다. 2023년 코펜하겐 대회에서 한국 배드민턴 사상 최초의 세계선수권 단식 챔피언이 된 뒤 3년 만에 다시 세계 정상에 섰다.

그런데 이번 금메달은 첫 우승과 느낌이 다르다. 2023년의 금메달이 새로운 여제의 탄생을 알린 선언이었다면, 2026년의 금메달은 시련을 통과한 여제가 다시 자신의 왕좌를 확인한 증명서에 가깝다.

안세영은 지난해 세계선수권 준결승에서 천위페이에게 패했다. 파리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국제대회를 휩쓸며 ‘당연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정작 가장 원했던 무대에서 멈췄다. 경기 뒤 스스로 "바보 같은 경기를 했다"고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지난해 중도 탈락의 아픔을 뒤로 하고 1년 만에 시상대 최정상에 오른 불굴의 안세영./뉴델리=AP.뉴시스
지난해 중도 탈락의 아픔을 뒤로 하고 1년 만에 시상대 최정상에 오른 불굴의 안세영./뉴델리=AP.뉴시스

스포츠에서 정상보다 어려운 것은 정상을 지키는 일이다. 더 어려운 것은 한번 무너진 뒤 다시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챔피언을 챔피언답게 만드는 것은 무패의 기록이 아니라 패배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약점을 고쳐 다시 돌아오는 능력이다.

안세영은 그것을 보여줬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상황도 순탄하지 않았다. 지난달 일본오픈에서 왼발 통증으로 기권하면서 세계선수권 출전 자체를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뉴델리에 도착한 안세영에게 부상의 흔적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64강부터 결승까지 6경기, 12게임을 치르면서 단 한 게임도 내주지 않았다. ‘12-0’의 퍼펙트 우승이다. 준결승에서는 중국의 왕즈이를 2-0으로 넘었고, 결승에서는 세계 2위 야마구치마저 2-0으로 제압했다. 말 그대로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차례로 넘어선 완벽한 대관식이었다.

특히 야마구치를 꺾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크다. 세계 여자 배드민턴의 가장 두꺼운 벽은 오랫동안 중국이었다. 안세영 역시 천위페이, 왕즈이 등 중국의 강호들과 수없이 왕좌를 다퉜다. 그러나 이번 결승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수는 중국 선수가 아니라 일본의 야마구치였다.

그것도 평범한 일본 선수가 아니다. 야마구치는 2021·2022·2025년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세 차례의 세계 챔피언이자 이번 대회의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이 일본에서 열리는 만큼 안세영에게는 앞으로도 반드시 넘어야 할 최대 경쟁자 가운데 한 명이다. 야마구치가 이번에 우승했다면 여자단식 사상 최초의 세계선수권 4회 우승에 성공하는 역사적 무대이기도 했다.

우승 상금은 없지만 세계 최정상의 명예와 랭킹 포인트 1만 4000점을 얻은 안세영이 시상식 후 환하게 웃고 있다./뉴델리=AP.뉴시스
우승 상금은 없지만 세계 최정상의 명예와 랭킹 포인트 1만 4000점을 얻은 안세영이 시상식 후 환하게 웃고 있다./뉴델리=AP.뉴시스

그런 야마구치를 안세영은 힘과 기술, 체력과 정신력에서 모두 압도했다. 1게임 16-17로 뒤진 순간부터 연속 5점을 따내 21-17로 뒤집었고, 2게임에서는 11-10까지 추격을 허용한 뒤 다시 격차를 벌려 21-14로 끝냈다. 상대가 가장 강하게 달려들 때 오히려 더 강해지는 모습이었다.

이번 승리로 야마구치와의 통산 상대전적도 20승15패, 최근 맞대결은 6연승이 됐다. 한때 자신보다 높은 벽처럼 보였던 선수를 이제는 확실한 우위에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개최국 일본이 기대하는 최고의 카드 가운데 하나가 야마구치다. 안세영으로서는 적지에서 만나게 될 가장 까다로운 경쟁자를 세계선수권 결승에서 먼저 완파한 셈이다. 기술적 승리를 넘어 심리적 우위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결과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세계 최고 권위의 대회에서 우승했는데도 안세영이 BWF로부터 받는 공식 우승 상금은 ‘0원’이라는 사실이다. BWF 세계선수권은 올림픽, 토마스컵, 우버컵 등과 함께 ‘Grade 1’ 대회로 분류된다. 일반 월드투어처럼 상금을 놓고 경쟁하는 대회가 아니라 국가를 대표해 세계 챔피언의 명예를 겨루는 대회라는 전통 때문이다. 대신 우승자에게는 세계 최고 수준인 랭킹포인트 1만4500점이 주어진다.

물론 시대가 변한 만큼 세계 최고 선수에게 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제도가 언제까지 타당한가는 BWF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세계육상과 세계수영 등 다른 종목의 세계선수권이 상당한 상금을 지급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논쟁의 여지는 충분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안세영의 우승은 그래서 더 상징적이다. 상금은 0원이지만 우승의 가치는 0원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 챔피언이라는 이름, 태극기를 달고 세계 최강자를 꺾었다는 명예, 그리고 실패했던 무대로 돌아와 자신의 힘으로 과거를 지워버린 기억이다.

프로스포츠가 천문학적인 돈의 전쟁으로 변해가는 시대다. 선수의 가치가 연봉과 상금, 스폰서 계약 규모로 평가된다. 하지만 스포츠의 가장 오래된 본질은 여전히 하나다. 누가 가장 강한가를 같은 조건에서 겨루는 것이다.

그 질문에 안세영은 뉴델리에서 명쾌하게 답했다. "내가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 더 반가운 것은 이날 한국 배드민턴이 안세영 혼자 웃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자복식 백하나-이소희도 세계 1위 중국의 류성수-탄닝을 2-0으로 꺾고 1995년 길영아-장혜옥 이후 31년 만에 세계선수권 여자복식 금메달을 되찾았다. 한국 배드민턴이 여자단식과 여자복식을 동시에 품으며 세계 중심으로 다시 올라선 하루였다.

안세영에게 이제 시선은 일본로 향한다.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여자단식과 여자단체전 2연패에 도전한다. 지난해의 패배가 없었다면 이번 우승은 어쩌면 또 하나의 금메달로 기록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번 넘어졌기 때문에 다시 일어선 모습은 더 강렬했다.

실패를 지운 것이 아니라 실패를 자신의 힘으로 바꿨다. 스물네 살 안세영이 세계 정상에 다시 오른 진짜 이유다. 그리고 상금 한 푼 없는 금메달이 어느 거액의 우승 상금보다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세영은 이제 단순히 세계랭킹 1위가 아니다. 패배해도 다시 돌아오는 법을 아는 진짜 ‘배드민턴 여제’가 됐다.

우승 상금은 없지만 세계 최정상의 명예와 랭킹 포인트 1만 4000점을 얻은 안세영이 시상식 후 환하게 웃고 있다./뉴델리=AP.뉴시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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