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에서 들은 현장의 목소리…한국축구가 다시 세워야 할 기본

[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한국 축구계에 이른바 ‘참사’라 불리는 충격적인 사태가 일어난 지 어느덧 13일이 지났다. 절차를 무시한 독단적 결정과 공정성의 붕괴는 팬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여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불통의 행정 속에서도 나의 축구여행은 멈추지 않는다. 여름철 축구하기 좋은 강원도 태백, 똬리를 튼 열기 속에서 땀방울을 흘리는 대학축구 현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어린 선수들과 지도자, 그리고 수많은 축구인들과 대화를 이어가며 나는 한국 축구의 진정한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누구를 만나든 화제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한국 축구의 미래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탄식 섞인 질문이다. 현장의 목소리는 단순한 감정적 비판이 아니었다. 한국 축구가 다시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절박하고도 간절한 염원이었다. 축구는 단순히 잔디 위에서 22명이 공을 차는 경기장 안의 게임이 아니다. 사람과 철학, 그리고 무너뜨릴 수 없는 ‘원칙’이 함께 만들어가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라는 사실을 태백의 바람 속에서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다.
흔히 사람들은 스포츠를 가리켜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말한다.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없고, 오직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과 순수한 실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기에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하고 눈물 흘린다. 만약 누군가 미리 각본을 짜놓고 움직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스포츠가 아닌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극일 뿐이다. 과거 승부조작에 가담한 선수와 관계자들이 왜 축구계에서 영구 퇴출당했는지를 상기해야 한다. 공정성과 신뢰가 무너지면 스포츠의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축구 행정 또한 이와 추호도 다르지 않다. 과정이 공정해야 그 결과도 국민과 팬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원칙을 잃은 억지 결정은 결국 더 큰 불신과 파멸적인 갈등을 낳을 뿐이다.
영화와 드라마는 훌륭한 시나리오와 치밀한 연출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천만 관객의 사랑을 받는다. 반면, 방향성을 잃고 개연성을 상실한 작품은 조기 종영이라는 시장의 냉정한 심판을 받게 마련이다. 지금의 축구 행정은 과연 어떠한가. 비전과 철학, 절차적 정당성과 대중적 공감이 있는 정책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지지를 얻는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밀실 정책과 일방적인 추진은 불신이라는 괴물을 키울 뿐이다. 맹자는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 했다. 하늘이 주는 좋은 때도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도 사람들의 화합과 공감만 못 하다는 뜻이다. 행정은 권력의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공감으로 완성되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축구 행정을 이끄는 이들이 ‘초짜’인지, 아니면 노련한 ‘타짜’인지를 묻고 있다. 축구 행정은 단순히 높은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현장의 치열함을 모르고 행정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면 초보적인 실수를 반복하며 공든 탑을 무너뜨린다. 반대로 경험만 많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지도자나 행정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전문가는 자신의 오랜 경험 위에 겸손함을 얹고, 결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초짜냐 타짜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축구라는 본질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현장의 목소리를 얼마나 존중하는가, 그리고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이다. 사람의 욕심보다 원칙이 앞설 때, 축구는 비로소 건강하게 자라난다.
자연 생태계는 그 누구도 억지로 지배하거나 독점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원리와 원칙 속에서 스스로 균형을 이루며 수천 년 동안 생명이 이어진다. 축구 생태계 역시 마찬가지다. 경쟁은 칼날처럼 치열하되 과정은 투명해야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실패에는 뼈아픈 책임이 따르고, 성공에는 그에 걸맞은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순리다. 순리를 거스르고 원칙을 무너뜨리면 생태계 전체가 붕괴되듯, 축구 역시 신뢰를 잃으면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주저앉는다.
지금 한국 축구가 당장 회복해야 할 것은 화려한 새로운 제도가 아니다. 잃어버린 ‘기본’을 찾는 일이다. 원칙, 공정, 책임, 존중이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가치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한국 축구가 이 사면초가의 위기를 벗어나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원칙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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