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전술과 공격전술의 충돌, 명장들의 '임기응변'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카를로 안첼로티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 경기 전 이번 32강전을 두고 "사실상 결승전"이라며 잔뜩 경계심을 드러냈을 때, 누군가는 세계 최강의 으레 있는 ‘외교적 수사’로 치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30일(한국시간) 펼쳐진 2026 북중미 월드컵 32강전 일본과 브라질의 90분은 그 말이 한치의 과장도 없는 순도 100%의 진심이었음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우승을 목표로 거침없이 질주하던 일본의 도전은 32강이라는 다소 이른 길목에서 멈춰 섰다. 조별리그부터 ‘죽음의 조’를 당당히 통과하고 32강에서 하필 브라질을 만나는 잔인한 대진 운이었지만, 피치 위에서 확인한 일본 축구의 저력은 이미 아시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월드클래스’의 그것이었다. 후반 추가시간 마르티넬리에게 허용한 뼈아픈 역전골로 1-2 패배를 당하며 도전은 4년 뒤로 미뤄졌지만, 그들이 세계 축구계에 던진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날 경기는 명장들의 수싸움이 빛난 전술의 경연장이었다.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은 브라질을 맞아 정교한 5-4-1 포메이션을 꺼내 들었다. 페널티 박스 주변에 촘촘한 ‘자물쇠’를 채우고, 전방에는 마에다 다이젠의 저돌적인 스피드를 배치해 카운터어택을 노리는 전략이었다. 특히 미드필더 사노 가이슈와 오른쪽 윙백 도안 리츠가 브라질 공격의 핵인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를 유기적으로 협공하며 전반전 브라질의 창을 무디게 만든 장면은 탁월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이 보여준 수비의 질(質)이다. 점유율은 30%대에 불과했으나 결코 내려앉기만 한 텐백(10-back)이 아니었다. 볼을 탈취하는 순간 미드필드진과 우에다 아야세가 순식간에 전방 공간으로 침투하며 브라질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압권은 브라질 골킥 상황에서 감행한 강력한 전방 압박이었다. 골키퍼의 롱킥을 강제해 중원 소유권을 재확보하는 고도의 조직력은 전반 29분 선제골의 발판이 됐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다닐루의 횡패스를 차단한 사노가 40여 미터를 폭풍처럼 질주한 뒤 꽂아 넣은 오른발 중거리 슛은 전 세계 축구팬을 경악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를 찔린 브라질은 63%의 점유율 우위 속에서도 일본의 완벽한 ‘공간 죽이기’에 막혀 비니시우스의 개인 기량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흐름에 갇혔다. 세계 최고의 재능들이 일본의 촘촘한 수비 격자망 안에서 시간만 보내는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브라질은 왜 자신들이 세계 최강인지를 후반전 ‘전술 변화’로 보여줬다. 전반 내내 발밑을 겨냥한 패스가 일본의 밀집 수비벽에 막히자, 안첼로티 감독은 후반 시작과 동시에 박스 주변에서 볼을 띄워 공략하는 얼리 크로스 전술로 선회했다. 결국 후반 6분 부르노 기마랑이스의 자로 잰 듯한 대각선 얼리 크로스를 카세미루가 타점 높은 헤더로 연결하며 동점을 만들었다. 홍명보 감독의 전술 부재와 무색무취한 경기력으로 국내 축구팬들에게 깊은 허탈감을 안겼던 한국 축구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명장의 임기응변과 해법 제시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시연회 같았다.
기세를 탄 브라질의 파상공세 속에서도 일본은 차분하게 버텼으나, 연장전 분위기가 짙어지던 후반 추가시간 5분 끝내 균열이 일어났다. 기마랑이스가 박스 정면에서 슛 모션으로 일본 수비진의 타이밍을 빼앗은 뒤 찔러준 패스를, 교체 투입된 마르티넬리가 정교한 오른발 슛으로 마무리하며 극적인 극장골을 터뜨렸다. 브라질은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위용을 증명했고, 일본은 석패했으나 세계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힘을 입증했다.
이웃 나라의 축구 팬으로서 솔직한 심정은 부러움을 넘어 시샘이 날 정도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스쿼드의 깊이다. 미토마 가오루, 미나미노 다쿠미, 엔도 와타루, 구보 타케후사 등 공수의 핵심 에이스들이 대거 줄부상으로 낙마한 최악의 조건이었음에도, 경기장 안에서는 전력의 공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특정 스타플레이어 한두 명에게 의존하는 축구가 아닌, 견고한 시스템과 두꺼운 더블 스쿼드의 힘이 어떻게 국제무대에서 발현되는지 일본은 몸소 보여주었다. 비록 32강에서 멈췄을지언정, 그들이 보여준 시스템 축구의 승리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러운 자산이자, 이제 우리가 어떤 축구를 준비해야 하는지 뼈아프게 파고드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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