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처럼 ‘언더독’의 굴레를 벗고 축구 중견국의 면모 찾을 때
!['바로 이 순간'! 한국 축구대표팀의 오현규(오른쪽)가 12일(한국 시간) 멕시코 사포판의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 체코와 경기 후반 35분에 역전 골을 넣고 있다. / AP 뉴시스]](https://img.tf.co.kr/article/home/2026/06/23/202690591782195289.jpg)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한국 축구의 월드컵 도전사는 늘 처절한 ‘언더독’의 역사였다. 매 경기 심장이 쪼여드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 시작해, 육탄방어로 버텨내다 간신히 승리를 낚아채거나 끝내 좌절의 굴욕을 맛보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우리가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상대를 시원하게 압도하며 주도권을 쥔 경기는 국내에서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폴란드전 정도를 제외하면 손에 꼽는 것조차 무색할 정도다.
이제 본선 참가국이 48개국으로 늘어난 ‘뉴 노멀’의 시대다. 이웃 나라 일본이 F조 약체로 지목된 튀니지를 상대로 4골 차 이상의 대승을 거두며 골득실 마진을 챙기듯, 대한민국 역시 이제는 ‘승점 자판기’ 신세를 벗어나야 한다. 약팀을 확실하게 제물 삼을 줄 아는 축구 중견국의 면모를 증명해야 할 때다.
마침 다가오는 남아공전은 그 최적의 무대다. 상대인 남아공 역시 32강행을 위해 무조건 승리가 필요한 상태다. 더 이상 라인을 내리거나 수비적으로 버티지 않고 과감한 맞불을 놓을 전망이다.
상대가 내려앉지 않고 공간을 열어준다는 것은, 한국 축구의 매서운 전방 화력을 100% 쏟아부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축구 팬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월드컵 무대에서의 닥치고 공격(닥공)’을 볼 수 있는 완벽한 판이 깔린 셈이다.

◆ 고착화된 전술의 타파: ‘손흥민 투톱’과 ‘옌스의 인버티드 윙백 기용’
이를 위해선 그동안 고착화되었던 전술 체제의 과감한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할 곳은 단조로웠던 ‘손흥민 원톱’의 변화다. 이제는 우리가 아껴두었던 공격 카드의 위력을 확인해야 한다.
최전방에서 상대 수비와 거칠게 싸워주며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는 오현규나 조규성을 투입해 ‘손흥민 투톱’ 조합을 가동할 필요가 있다. 타깃맨들이 전방에서 버텨주고 공간을 열어준다면, 손흥민은 자신이 가장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하프스페이스(측면과 중앙 사이 공간)와 박스 인근에서 자유롭게 골문을 타격할 기회를 잡게 된다. 아니면 손흥민의 재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왼쪽 윙포워드 기용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풀백 라인의 세대교체와 전술적 다양성도 필수적이다. 그동안 이태석, 설영우, 김문환 등으로 이어지던 기존 풀백 조합은 부지런한 활동량에도 불구하고 공수 양면에서 다소 단조로운 패턴을 보였다.
특히 지난 멕시코전에서 평소와 다르게 왼쪽 측면에 배치된 설영우는 빌드업 상황에서 템포가 한 박자 늦어지거나 왼발 크로스의 정교함이 떨어지는 전술적 아쉬움이 반복해서 노출되었다. 현대 축구에서 풀백의 센스와 세밀한 공격 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제는 정형화된 틀을 깨야 할 시점이다.
이에 대한 명쾌한 대안으로 ‘옌스 카스트로프의 인버티드(Inverted) 풀백’ 기용을 적극 제안한다. 중앙 지향적인 움직임과 패싱 능력을 갖춘 옌스를 왼쪽 측면에 배치해 빌드업 시 중원 지원과 공격 전개를 돕게 유도하는 것이다.
옌스가 안쪽으로 좁혀 들어오며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하고, 반대편 오른쪽 측면에 상대의 측면을 허물고 중앙으로 파고들 수 있는 우측면 자원들을 적극 배치한다면 한국의 좌우 공격 밸런스는 비대칭적이면서도 극도로 다채로워질 수 있다.

◆ 에이스를 살리는 판짜기, 감독의 무거운 책임
마지막으로 이번 월드컵은 한국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손흥민의 ‘대기록 신고식’이 되어야 한다. 현재 손흥민은 박지성, 안정환과 함께 한국 선수 월드컵 통산 최다 골(3골) 부문 공동 1위에 올라 있으며, 한국 축구의 전설 차범근이 보유한 A매치 역대 최다 골(58골) 기록에도 단 2골 차로 접근해 있다.
이집트의 1992년생 동기생 모하메드 살라가 지난 22일 뉴질랜드전에서 본선 마수걸이 골을 신고하며 에이스의 품격을 보여준 것처럼, 이제는 우리 ‘국민 공격수’ 손흥민이 환하게 웃을 차례다. 남아공전에서 A매치 최다 골 신기록마저 정조준하게 될 이번 월드컵 첫 포가 시원하게 터져준다면 대표팀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결국 이 모든 판을 짜는 것은 감독의 몫이며, 애석하게도 이는 곧 국민들의 불신과 우려가 가장 깊게 쏠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비기기만 해도 32강에 간다'는 안이한 계산법에 사로잡혀, 또다시 골을 먹지 않기 위한 '비기기 작전'을 펼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대표팀 수뇌부는 이러한 나약한 생각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에이스를 전방에 홀로 고립시킨 채 지나친 수비 가담과 고독한 압박만을 요구하는 전술은 국민의 기대를 배신하는 직무유기다. 감독은 에이스가 오롯이 ‘피니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전술적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뉴질랜드전에서 터진 살라의 골 역시 철저히 에이스를 살려준 전술적 환경의 산물이었다. 감독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손흥민의 발끝은 언제든 불을 뿜을 준비가 되어 있다.

◆ 대승이 가져올 스쿼드의 여유, 그리고 토너먼트 로드맵
손흥민의 발끝이 터져야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대승'의 문이 열린다. 이른 시점에 큰 점수 차로 리드하는 것은 단순한 만족감을 넘어 토너먼트를 위한 최고의 전략이다.
주축 선수들에게 심리적, 체력적 여유를 주어 조기에 휴식을 부여하고, 그동안 기회를 잡지 못했던 백업 멤버들에게 월드컵 무대의 실전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향후 스쿼드 운용의 폭을 넓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멕시코전을 승리로 장식하지 못한 대가로, 향후 대표팀 앞에는 가혹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만약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된다면, 곧바로 LA로 이동해 단 3일 휴식 후 바로 32강전을 치러야 한다.
체력을 회복할 시간도 부족한 마당에 시차 발생 및 장거리 비행 이동까지 겹치는 본격적인 ‘체력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남아공전 전반전에 확실한 다득점으로 승기를 잡고 주전들의 체력을 안배하는 정교한 벤치의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남아공전은 단순한 승점 3점을 넘어, 한국 축구가 월드컵 무대에서 주도적인 축구로 체급의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지 확인할 시험대다. 전술적 유연성과 에이스의 파괴력, 그리고 영리한 스쿼드 운용까지 동시에 증명해야 할 남아공전을 앞두고, 새로운 이정표를 갈망하는 축구 팬들의 마음에는 설렘을 넘어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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